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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게시판

별을 그린 사람

2008.09.07 21:18

네모Dori 조회 수:260814

별을 그린 사람


아직 밤이 생기고 세오가 달에서 살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그때는 아직 밤하늘은 새카맣기만 했다. 어느 날 직녀가 새로이 짠 천을 들고 모두의 어머니 유화부인에게 왔다. 연오가 떨어트린 첫 번째 해의 그림자로 짠 그 천은 어둠보다 깊은 어둠으로, 칠흑보다 짙은 칠흑으로 보는 사람마다 매혹시키고 마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유화부인은 그 천으로 홀로 달에서 살게 된 외로운 세오의 하늘을 꾸며주기로 마음먹었다.

‘이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이 귀한 천을 누가 장식할 수 있을까’

그 때 세상에서 가장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화웅이었다.
화웅은 눈이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외눈에 담은 모든 것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는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화웅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음식 그림을 내 놓으면 손님들은 만져보고 나서야 그림인 줄 알고 즐거워했다. 유화는 어둠의 천을 들고 화웅에게 갔다. 느닷없는 신의 방문에 깜짝 놀란 화웅에게 유화부인이 말했다.

‘천을 장식해라. 3년 뒤 같은 날에 다시 오겠다’

유화부인이 사라지고 화웅은 혼자서 다시 어둠의 천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과연 다시없을 귀한 천이었다. 화웅은 천을 잘 갈무리하여 지하의 작업장으로 갔다. 그 곳에서 화웅은 모든 등불을 끄고 덧창에 휘장까지 치고서 빛 한줄기 없는 가운데 다시금 천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화웅은 천을 바라보며 무엇을 그릴지 생각했다.
그러기를 1년 만에 화웅은 다시 집 밖으로 나왔다. 이번엔 한 곳에 가만히 머물지 않았다. 세상 곳곳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북국의 살을 에는 얼음산을 오르더니 남국의 타오르는 사막을 가로질렀다. 끓어오르는 화산을 찾아가고 흔들림 없이 고요한 호수로 향했다. 산, 바다, 숲, 강, 들, 사막, 그리고.
세상 온갖 것을 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화웅에게 유화부인이 약속한 시간은 이제 채 한 달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제야 화웅은 그림 그릴 준비를 시작했다. 외각수의 털을 고르고 신단수의 가지를 다듬어 붓을 만들었다. 짧은 새벽의 이슬을 모아 깨끗한 물을 마련했다. 어느새 유화부인이 오기로 한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세오마저 깊게 잠든 그믐밤이었다. 화웅은 준비한 모든 것을 가지고 지하의 작업장으로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도 두드러지는 어둠으로 천은 화웅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감고 고요히 숨을 고르기를 얼마, 다시 뜬 화웅의 눈에서 광채가 번뜩였다.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그대로 붓을 따라 천위를 내달렸다. 그간 화웅이 보아 온 수많은 색들이 화웅의 붓 끝에서 새로운 빛의 춤사위로 살아나고 있었다. 그 빛과 모습은 온갖 것과 닮았지만 어느 하나같지 않았다. 어느 것은 용암의 이글거림 같았고 또 어느 것은 빛살에 반짝이는 새하얀 소금처럼도 보였다. 또 다른 어느 것은 사막 가운데 오아시스가 간직한 신비로움을 담은 듯 했고 또 어느 것은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한 얼음산의 눈부심을 옮긴 듯도 했다. 화웅의 붓은 멈추지도, 망설이지도, 주춤하지도 않았다. 힘차면서도 세세하게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아가듯 당연하게 움직였다.
어둠의 천이 빛을 머금어 감과 함께 바깥세상도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그림을 다 그린 화웅은 조용히 붓을 놓았다. 모든 것을 살라먹고 사그라진 불꽃처럼 화웅에겐 손 끝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 단 한 가지 자신이 그리지 않은 빛이 떠올랐다. 세상의 모든 빛을 비췄을 자신의 눈이 머금은 빛. 그 빛은 옮기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화웅에겐 또 다른 무엇을 그릴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화웅의 몸이 서서히 기울더니 천에 얼굴을 묻고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연오가 또다시 해를 이끌어 세상에 새 날이 밝아왔다. 유화부인은 약속한 날이 되어 화웅을 찾았다. 작업장에서 유화부인은 새로워진 어둠의 천을 보았다. 3년 만에 다시 마주한 어둠의 천은 이제 더 이상 어둠의 천이라 부를 수 없었다. 빛이 수놓아진 아름다운 천을 바라보며 유화부인은 천에 엎드려 있는 화웅을 불렀다. 하지만 이미 화웅은 죽어있었다.
유화부인은 천을 갈무리하여 하늘로 올라가 그림에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화웅이 그린 그림이 생명을 얻어 반짝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화부인은 그 천으로 어둡기만 하던 밤하늘을 장식했다.
그렇게 하늘에는 별이 생겨났다. 그런데 그 중에 화웅이 직접 그리지 않은 별도 하나 같이 생겨났다. 밤하늘의 밑자락에서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 잠시 뜨고 지고 마는 그 별은 어떤 별들보다도 밝고 아름다운 빛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화웅이 그렸던 그림은 모두 사라졌지만 단 하나 밤하늘에 수놓아진 별들은 처음 그 날처럼 지금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07. 10.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