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남자들도, 프랑스 남자들도, 심지어 일본 남자들까지도 우리나라 남자들보다 멋있다. 그렇다면 이탈리아 남자들보다 깔끔하고, 프랑 스 남자들보다 머리숱 많고, 일본 남자들보다 키 큰 우리나라 남자들이 그들보다 덜 멋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 옷을 못 입기 때문이다.
'애마부인’이 단지 말을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듯, 남자들 사이에서 ‘백마’라는 단어가 단순히 하얀 말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것쯤, 우리 여자들도 다 알고 있다.
며칠 전, 대학 선배들과의 식사 자리에서도 이 ‘백마’라는 동물적이기 짝이 없는 단어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야기의 요지는 우리 동아리 유일의 고시 합격자이자, 현재 유능한 변호사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가(물론 그는 이번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지난 연말, 한 파티에 참석했다가 캐나디안 여성과 뭐 그렇고 그런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이야기 자체보다는 그 이야기를 전하는 선배의 태도에 더 충격을 받았다.
친구와 백인 여성의 정사를 전하면서 그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운을 뗐던 것이다.
“에이, 왜 그거 있잖아. 모든 남자가 꿈꾸는 그거…”
정말 세상 모든 남자가 그걸 꿈꾼단 말이냐? 힘 좋은 흑인 남자 앞에서 사족을 못 쓰는 일본 여자에게는 그토록 욕을 해대면서? 그럼 여자들도 백인 남자나 흑인 남자와의 정사를 꿈꾸는 일이 별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네? 내 맘속의 반항아적 기질이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시작하기 전에 분명히 밝혀두겠다. 내 세계 각국의 옷 잘입는 남자들을 이렇게 추억하게 된 것은 편집장의 권유에 따른 것이지, 혹여나 그들에게 흑심을 품었다거나 ‘백마 타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남자들에 대한 유치한 반항심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밀라노에서 만난 그 남자, 미켈레 ‘미켈레’라는 이름은 좀 웃기지만(한 켤레, 두 켤레, 미켈레…) 미켈레는 정말 멋진 청년이었다. 미켈레는 밀라노에서 열린 남성복 컬렉션을 취재하러 갔을 때, 우리 차를 운전해주던 학생으로 보송보송한 솜털이 얼굴을 뒤덮고 있는 귀여운 청년이었다.
밀라노에 있는 일주일 동안 매일 미켈레를 만났지만 미켈레가 입고 오는 옷들은 다 그렇고 그런,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입고 다니는 것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옷들이었다.
오리털도 아닌, 폴리에스테르 솜이 들어 있음이 분명한 싸구려 점퍼, 낡은 리바이스 청바지, 검은색 컨버스 스니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켈레는 어쩜 그리도 스타일리시한지! 나와 동행했던, 패션계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유명 스타일리스트조차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우리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미켈레, 오늘은 뭐 입었어?(미처 그날 아직 미켈레를 보지 못한 이)” “아, 너무 귀엽게 입었어.” “뭐 입었는데?” “응? 그냥 청바지. 그리고 어제 입었던 그 파란색 점퍼.” …
분명 미켈레에게는 무언가가 있었다. 다른 남자가 입었다면 별 볼일 없었을 그 옷들을 그렇게 멋있게 소화해내는 그 무언가! 밀라노를 떠나기 전날 밤, 미켈레와의 이별이 아쉬웠던 우리는 비싸기로 유명한 중국집으로 그를 초대했다. 다섯 명의 여자와, 미켈레가 둥근 탁자에 둘러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미켈레의 비밀이 밝혀졌다.
“아니, 미켈레. 왜 이렇게 안 먹어?” “…(웃음)” “새우 싫어해요?” “너무 늦었잖아요. 많이 먹는 건 좋지 않아요. 살도 찌고…. 난 조금만 방심해도 살이 찌기 때문에 늘 조심해야 해요.”
그러고 보니 몇 번인가 점심을 같이 먹었는데 미켈레가 뭔가를 깨끗이 다 먹어치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핫도그와 콜라로 점심을 때울 때도 미켈레는 핫도그 하나를 다 먹지 않았다. 미켈레의 비밀은 거기에 있었다. 175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서양인으로서는 작은 키의 미켈레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옷을 그토록 멋지게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그토록 철저하게 몸매를 관리해온 덕이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은 몸매 관리에 관심이 없다. 아니, 관심은 많지만 실천하지 않는다. 그리고 몸매 가꾸기에 관심 있는 극소수의 남자들 중 90퍼센트는 근육 키우기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명심하라. 옷을 벗고 있을 땐 누구보다도 멋진 차인표가 옷을 입으면 멋있지 않은 이유는 모두 그의 울룩불룩한 근육 탓이다. 벗었을 때 멋지고 싶다면 지금처럼 달걀 노른자만 먹으면서 근육을 키우고, 입었을 때 멋진 남자가 되고 싶다면 살을 빼라. 그리고 멋있어지기 위해 살을 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라. 여자들이 ‘다이어트’를 입에 달고 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예순을 훨씬 넘긴 세계적인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그는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기도 하다)가 그의 애인 에디 슬리먼이 디자인한 디올 옴므 수트를 입기 위해 30킬로그램 이상 살을 뺐다는 이야기를 그냥 가십거리로 여길 것이 아니다.
라거펠트는 말했다. 30킬로그램의 감량으로 자신은 다시 태어났으며, 남들 앞에 훨씬 자신감 있게 설 수 있게 되었다고.
카레 냄새의 추억, 로이 로이! 내 어찌 로이를 잊을 수 있으랴! 로이는 나와 나의 스태프들의 인도 촬영을 도와준 가이드였다.
하루 숙박비 약 20만원으로 우리집 욕조의 세 배가 넘는 큰 욕조(그것도 자쿠지까지 설치되어 있는)가 있는 방에서 묵을 수 있었던 인도. 그곳에서 우리는 아주 풍요로운 일정을 보낼 수 있었지만 인도는 정말 가난한 나라였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지저분했고 로이의 옷차림 역시 남루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안 들었던 건 로이가 신고 있던 샌들! 로이는 10년 전, 우리나라에서 한창 유행했던 스포츠 샌들을 신고, 거기에 회색 양말을 신고 다녔다.
한 켤레밖에 없어서 매일 밤 빨아서 말려 신는지, 아니면 로이가 믿는다는 이슬람교의 교리 중에 ‘양말을 신을 때는 회색 양말만!’이라 는 가르침이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매일 아침 로이는 똑같은 회색 양말을 신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나는 로이의 회색 양말과 그 위에 얌전히 신겨진 스포츠 샌들이 싫다 못해 혐오스럽기까지 했지만 로이를 미워할 수 없었다. 로이는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가이드들 중 가장 ‘돈독’이 덜 오른 사람이었으니까.
로이의 이야기를 이토록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로이가 입고 다녔던 화려한 색감의 셔츠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스포츠 샌들에서부터 시작해서 바뀌지 않는 회색 양말 등 어느 하나 제대로 된 아이템을 갖추지 못한 로이였지만 로이가 입고 다니는 셔츠의 색감만은 기가 막혔다.
대부분 기본적인 디자인의 셔츠였는데 색깔이 다 오렌지, 노랑, 빨강 같은 원색이었다.
까딱하면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는 그 화려한 색상의 셔츠들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소화할 수 있었던 건, 그 화려한 색감을 전혀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로이의 태도 덕이었던 것 같다.
로이는 자신의 울긋불긋한 셔츠를 하나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하긴 로이는 스포츠 샌들에 회색 양말 신는 것도 전혀 어색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아서 떠날 때가 다가올 즈음엔 나조차 로이의 그 발이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이 검정, 흰색, 회색, 감색 외의 옷을 부담스러워한다.
봄이 되어 화사하게 차려입는다 해도 그 색의 범주가 베이지나 하늘색을 벗어나지 않는다. 심지어는 넥타이 색깔마저도 노랑이나 초록 등 화사한 색깔은 피하고 싶어한다.
나의 선배 하나는 동물이 프린트된 페라가모 넥타이가 너무 갖고 싶다며 노래를 불렀지만 정작 그 넥타이를 선물로 받은 뒤에는 한 번도 매지 않았다.
“내가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니야. 처음 그 넥타이를 선물 받고, 며칠 동안은 아침마다 그 타이를 매보려고 시도했지. 근데 현관에 나와서 신발을 신을 때면 자꾸 망설여지는 거야.
‘사람들이 너무 쳐다보지는 않을까?’ ‘내가 너무 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더라구. 심지어 그 넥타이를 매고 주차장까지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 적도 있다니깐. 우리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그날따라 내 넥타이만 뚫어지게 쳐다보시는 거야. 사실 그 노란색이 좀 눈에 띄긴 하잖냐? 그래서 당장 집으로 뛰어올라가 다른 걸로 고쳐 매고 나왔지.”
한국 남자들이 좋아하는 미니멀한 옷들은 남들에게 옷차림 때문에 손가락질 받을 확률을 거의 제로에 가깝게 줄여주는 안전한 보험과도 같지만, 그에 비례해 ‘멋지다’는 찬사를 받을 수 있는 확률도 그만큼 낮은 것이 사실이다.
옷입기는 투자와 비슷하다. 리스크가 큰 투자일수록 성공했을 때 돌아오는 이익이 큰 것처럼, 위험을 무릅쓸수록 “특이하다” 혹은 “멋지다”는 소리를 들을 확률이 높아진다.
왜 주변 사람들에게서 “옷을 잘입는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하면서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해볼 생각은 하지 않는가?
명심하라. 은행에 적금만 드는 사람은 평생 안정된 삶을 살 수는 있겠지만 큰 부자가 될 수는 없다. 옷 입기도 마찬가지다. 허구한 날, 그렇게 검은색 니트에 검은색 바지만 고집하다간 당신의 옷장은 십년 후에도 그렇게 심심한 옷들로만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번 결정했으면 끝까지 밀어붙여라. 귀가 얇은 사람 역시 부자가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평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람은 멋쟁이가 될 수 없다. 자신이 선택한 옷에 대한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별 볼일 없는 옷도 다시 한 번 쳐다보게 만든다.
가와이, 준이치 일제시대에 저지른 만행과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일본의 독도 만행에 대해 치를 떨고 있는 나로서는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일본 남자들이 귀엽긴 귀엽다. 지난가을, 철들고 나서는 처음으로 일본에 갔던 나는 살인적인 물가에 치를 떨었지만 귀여운 일본 남자들만 보면 기분이 다시 좋아지곤 했다.
준이치는 내가 묵었던 호텔 앞에 있는 편의점 계산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이었다.
일본에 도착한 날 밤, 출출해진 나는 뭔가 먹을 것을 사기 위해, 그리고 일본의 편의점을 구경하기 위해 호텔방을 나섰는데 준이치는 내가 삼각김밥 고르는 것을 아주 열심히 도와 줬다. 일본말을 거의 모르는 나를 위해 안 되는 영어를 써가며. 나 역시 어쭙잖은 영어 실력으로 그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봤는데 “Are you a student?”라고 중학교 1학년 수준의 영어로 물어보자 준이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대뜸 “Are you Chinese?”라고 묻길래 약간 빈정이 상하긴 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의 일인자인 나는 ‘내가 어딜 봐서 중국 여자처럼 생겼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 눈이 찢어졌나? 하긴, 장만옥같이 예쁜 중국 여자도 있지. 흠…, 결국 내가 장만옥을 닮았단 얘기군. 흐흐…’하는 생각의 흐름에 따라 멋대로 해석을 내리고 그때부터 준이치를 좋아하기로 했다.
준이치는 요지 야마모토의 재킷과 루이 비통의 백팩을 사기 위해 밤을 지새며 일한다고 했다. 일단 이번달까지 모은 돈으로는 루이 비통 백팩을 사고, 그러고 나서 몇 달을 더 모아 요지 야마모토의 재킷을 살 거라고. 우리 돈으로 기백만원은 족히 넘는 요지 야마모토의 재킷을 사기 위해 준이치는 아마 가을이 다 가고 겨울이 끝나가는 지금도 편의점 계산대 앞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일본 남자들은 옷을 사는 데 쓰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건 하나의 기쁨이다. 그런데 유독 한국 남자들만 옷 사는 데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한다. 그렇다고 그 돈을 건설적인 곳에 쓰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니, 그게 또 문제다.
친구들 만나서 술 마시고, 후배들 만나서 술 사주고, 여자들 만나서 술 마신다.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가꾸는 데 들이는 돈을 아까워한다. 술독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쓴 돈 두 달만 모아봐라.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수트를 사고도 남는다.
경제가 불황에 접어들면서 몇 개의 남성복 브랜드가 문을 닫았다. 아직 문을 닫지 않은 브랜드의 관계자들도 울상을 짓기는 마찬가지 다.
왜 유독 남성복만 이렇게 큰 타격을 입는고 하니, 우리나라 남자들은 옷 사는 걸 무조건 사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기가 이렇게 안 좋은데 흥청망청 돈을 쓰라는 것이 아니다.
옷을 사는 건 낭비라는 그 무모한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이번 칼럼을 쓰기 위해 한국의 옷 잘입는 남자들에게도 “어떻게 하면 그렇게 옷을 잘입을 수 있지요?” 하고 물어보았지만 뭐, 결론적으로 별다른 비결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이 옷을 잘입기 위해 애쓰는 걸 부끄럽게 여겨요. 매일 밤, 거울 앞에서 어떻게 하면 멋지게 보일까, 연구하는 남자들도 정작 밖에 나올 땐 어제나, 그저께와 똑같은 차림으로 나오죠. 부끄러운 거예요. 내 맘에 드느냐보다는 남들이 날 어떻게 볼까에 대해 더 신경을 쓰니까요. 그러니 옷을 잘입을 수가 없어요. 옷을 입는 능력도 자꾸 연습하다 보면 계발되는 건데, 그걸 안 하려고 하죠”라던 디자이너 한승수의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옷을 잘입고 싶다면 일단 옷을 잘입고 싶다는 생각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 것. 그리고 옷을 잘입을 수 있도록 연구할 것. 옷 잘입는 사람들이 어떻게 입는지 잘 살펴보고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연구할 것. 그리고 혼자 연습할 것.
연습을 했으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일단은 시도할 것(리스크가 높으면 수익도 높아진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 그리고 필요할 땐 과감히 투자할 것. 그러고 보니 옷 잘입는 방법은 학창 시절 우등생들이 들려주었던 공부 잘하는 방법과 비슷하다. 공부 잘하는 애들이 어떻게 공부하는지 잘 볼 것. 그리고 자신에게 맞는 효율적인 공부 방법을 연구할 것.
결론이 나왔으면 거기서 그치지 말고 반드시 그 방법대로 실천할 것. 그리고 필요하다면 떡볶이 사 먹을 돈을 과감히 참고서 사는 데 투자할 것!
내, 이제야 나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던 우리반 1등의 심정을 알겠다.
“야, 너는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잘해?” 하면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뭐” 하던 얄미운 놈.
그런데 정말 방법은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다. 그러니, 지름길을 아는 자여, 나에게 돌을 던지라!
ⓒEsquire 글/심정희(에스콰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