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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게시판

칠일 [The Seven Days]

2005.05.03 05:56

네모Dori 조회 수:2154

칠일 [The Seven Days]


- 하 루 -

타박, 타박. 한 남자가 설원에서 힘겨운 걸음을 이어간다. 순백의 세상에 그가 만들어 내는 목적성 없는 발자국의 음영만이 두드러진다. 쉼 없이 내리는 눈은 길게 늘어진 자취를 하나 둘 묻어간다. 그래서 남자는 언제나 시작이다. 이거 설맹에 걸리는 거 아냐? 흰 풍광에 지쳐가는 남자의 시야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들어온다. 붉은색. 붉은색 팻말.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쌓인 눈을 쓸어낸다. 그의 입에서 한숨처럼 말이 새어나온다.

“시실(時失). 시간을 잊은 곳이라. 흥”

자조적인 냉소다. 추위에 얼어버려 그런 것인지, 아니면 버릇인지. 남겨지는 발자국이 목적성을 띄어간다. 눈은 그의 과거를 쉼 없이 지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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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 여기 커피한잔 주세요. 알콜을 좀 타서”

콜록 콜록. 너무 오랫동안 추운 곳을 걸은 탓인가. 그의 기침이 쉬 멈추지 않는다. 약간 어두운 조명의 아늑한 내부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 어두운 저 구석, 조그마한 무대에서 한 여자가 노래하고 있다.

“자, 여기 대령이오”

“저기 저 여자는 누구죠?”

“응? 아아, 페시네테. 페시네테 사로라고 이 가게의 가수이자 시실 최고의 인기인이지”

긴 앞머리가 얼굴을 모두 가려버려 보이는 거라고는 눈처럼 하얀 얼굴에 섬뜩하니 붉은 조그마한 입술뿐이다. 그는 아까 본 팻말을 떠올린다. 사로는 그 작은 입술로 애잔함이 느껴지는 영혼의 울림을 토해낸다.

<<At Christmas I`m leaving you babe, but I love you. I mean it from the bottom of my heart.
If you`d just told me, I`d never ever leave you. I need you must of all.
Oh- I really want to stay.
Every moment of lovely days we`re together. We`d rowed across the River of our Dream.
Every season, every happy funny day, they`re all alive in my heart.
Oh- I`ll never ever forget.>>

"이봐, 자네 여행자지?“

“뭐, 그런 셈이죠”

“자네를 위해 충고하네만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뭘 말입니까?"

“페시네테”

<<It`s blue. Because you`re not hear.
It`s blue, blue, blue Christmas.>>

노래가 끝났다. 그는 취기를 느낀다. 커피에 섞인 몇 방울의 알콜 때문에 몸이 취한 것인지, 아니면 저 검은머리의 가수가 부른 노래에 정신이 취해버린 것인지. 입가에 매달린 건 웃음인지 비웃음인지, 그는 걸어가 쾌활하게 말을 건넨다. 분명 취한 탓도 있으리라.

“이봐요 멋진 아가씨. 잠깐 이야기 좀 하죠? 저는 네오라고 합니다만”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사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어떠한 반응도 없이 자기 짐을 정리하는 사로를 보며 네오는 순간 귀머거리인가 하는 생각을 떠올린다. 하지만 슬그머니 커지기 시작하는 웃음소리들이 네오를 화나게 한다. 뭐야, 광대놀음이야? 네오는 오기가 난다.

“언제 우스꽝스레 끝날지 모르는 생, 왜 그리 딱딱해요? 제가 살 테니 잠깐 이야기나 하자니까요?”

순간 멈칫하는 듯 했지만 정말 순간이다. 그대로 사로가 네오를 지나치려는 찰나, 네오가 말한다. 여전히 쾌활한 어조로.

“최대한 현재를 즐겨야죠, 안 그래요?”

사로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린다. 그 격한 동작이 네오의 숨을 막히게 한다. 긴 앞머리 너머로 검은 눈동자가 보인다. 그 속에 들어있는 감정은 놀람인가? 네오는 확신하지 못한다. 평상시와 다른 사로의 반응에 가게 전체가 조용하다. 그리고 그 감정이 분노일지도 모르겠다고 네오가 생각하는 순간, 사로는 몸을 돌려 문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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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하하하, 내가 뭐랬는가. 단념하라고 했지?”

“칫, 뭐예요 저 여자. 벙어리는 아니고, 귀머거립니까?”

“당연히 아니지. 눈이 좀 나쁘긴 하지만”

눈이 나쁘다라. 네오는 아까 전 기억을 떠올린다. 얼굴을 거진 다 덮어버린 긴 머리 사이로 보인 것은 크고 검은 눈동자.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자그마한 체구. 이 근방 출신은 아니군. 사람 좋은 주인의 목소리가 네오의 생각을 흩어버린다.

“이봐 포기하게. 자네가 눈의 여왕의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은가?”

“눈의 여왕?”

“그래. 페시네테의 별칭이지”

네오의 머릿속에 사로의 모습과 노랫소리와 그리고 비웃음소리들이 다시금 떠오른다. 오기가 난다.

“내기하나 하죠?”

“내기?”

“일주일이 지나도 그 여자, 페시네테 사로가 눈의 여왕이라면 제가 모든 요금을 10배로 계산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기면 모두 공짜로. 어때요?”

주인의 미소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크고 작은 웃음소리 밖으로 눈은 끝없이 내린다.



- 이 틀 -

콜록콜록. 네오의 기침이 더욱 심해졌다. 보는 사람이 안쓰럽다. 타악. 고개를 들자 김이 피어나는 따뜻한 커피다.

“이곳은 일년 내 춥지만 겨울은 특히 더 춥지. 몸을 따뜻하게 해야 되네. 많이 마셔”

“그리고 내기에서 진후에 돈도 많이 내구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즐거워 웃고 웃어서 웃는다. 술집이자 여관이자 음식점답게 아침에도 손님이 몇 있다. 주인은 이리저리 움직이고 네오는 커피를 홀짝인다. 창밖으론 쉼 없이 내리던 눈이 슬그머니 멎었다. 그렇다고 쌓인 눈이 녹을 것 같지는 않지만. 눈을 쓸고, 퍼내고, 걷어내느라 거리는 분주하다. 조용히 바라보며 네오는 이렇게 느긋하게 있는 것도 오랜만이라 생각한다. 여유를 가지려 시작한 여행인데 웃기군.
먼 곳을 향했던 시선을 안으로 당긴다. 작은 도시답게 손님은 모두 단골이다. 특별한 무엇도 없는 이런 도시에 특별한 것이라면 나 같은 여행자지. 신기해서 말 걸기도 무서울 정도로 말이야. 네오는 예의 그 웃음을 짓는다.

“이봐요 주인장. 저기 가수아가씨는 언제 옵니까?”

“페시네테? 해가지면 올걸세. 왜 그러나?”

“일단 정보를 모아야죠”

주인이 크게 웃는다. 호방하다.

“그래 아직은 자신이 있나보지? 정보라, 아무집이나 들러서 물어보게. 잘 대해 줄게야. 겨울이라 일도 없고 모두 심심하거든. 아, 선물 사가는 것 잊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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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나절 내내 사람들이 눈을 치웠지만 포석이 드러나려면 턱도 없다.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눈이 내리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훨씬 많다보니 눈을 치우는 게 의미 없긴 하다. 그래서 지붕 위와 끝만 좀 신경 써서 걷어내고 문 앞쪽만 쓸어내고 길 표시만 내어두고 네오는 얼음판 위를 조심스레 걷는다. 종일토록 마을을 다녔지만 쓸만한 정보가 없다. 예상 밖인걸. 네오는 질지도 모르겠다 걱정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비웃는다.

“마을 최고의 인기인이라더니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는 사람이 없냐”

해도 거진 저물었다. 추워지기 시작하자 기침이 다시 심해지지만 네오의 발걸음은 여전히 느긋하다. 계획은 다 세웠고,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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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꽤나 많다. 인기인이긴 인기인인 모양이네. 피식 웃으며 네오는 따뜻한 커피에 (이것도 이제 자동이구만) 왼 주머니에서 꺼낸 가루를 넣어 녹인다.

“뭔가 그거?”

“맛있는 커피를 더욱 맛있게 만드는 설탕 같은 것이죠. 그건 그렇고 사로는?”

“이제 슬슬 나오겠지. 그래 오늘 만족스러웠나?”

따뜻한 기운이 네오의 언 몸을 녹인다. 속이 뜨거워오며 기침도 좀 잦아든다.

“영 꽝이에요. 이거 정말 지겠는데요?”

“크하하하. 아, 페시네테구만”

소음이 잦아들며 모두의 시선이 사로를 좇는다. 역시 모두가 기다리는 인기인의 등장인가. 눈의 여왕이란 별칭답게 사로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산책을 하는듯한 걸음걸이다. 손 닿는 곳만 벗어나면 거의 안 보인다던가. 네오에게 사로의 모습이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을 내리깐 것이나 약간 끄는 듯한 걸음걸이, 그리고 앞으로 살짝 내민 손 같은 것 말이다. 긴 머리카락 때문에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여전히 보이는 건 숨 막히게 새빨간 입술. 하얀 피부 덕에 더욱 빨갛게 보인다. 네오는 왠지 안타깝다. 무대에 선 사로는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호흡처럼 자연스레 노래가 흘러나온다. 슬프다.

<<It`s so cold here without you. The wind blow, the time`s up.
I`ll do anything to change the last a year with you.
There is one thing I have to say to you.
I`d never meant to let you cry.>>

"항상 저런 분위기의 노래만 불러요? 그래도 장사가 되나?“

“보면 알잖은가”

주위를 둘러보니 노래에 취한 것은 자신만이 아니다. 네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한숨을 내어쉬듯, 묘하게 매력적이다. 사로는 노래하고 네오는 생각한다. 마음에 어떤 것을 묻었기에 저토록 매혹적인 슬픈 영혼을 토해내는가. 노래는 절정을 넘어 끝으로 수렴된다.

<<There is one thing I have to say to you.
I`d never meant to let you die.>>

노래가 끝나고 잠시 쉬기 위해 사로가 나가자 갑자기 네오가 일어선다. 주인이 놀라 묻는다.

“왜 갑자기, 무슨 일인가?”

“이제 슬슬 움직여야죠”

“응?”

씨익 웃는다. 웃음인지 비웃음인지, 타인을 향하는지 자신에게 보내는 건지. 확실한건 허무가 묻어나는 차가움이라는 것.

“최대한 현재를 즐겨라! 이겨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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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골목에 누군가 서있다. 네오다. 기침이 다시금 심해진다. 덕택에 손 녹이긴 좋네. 네오는 씩 웃는다. 생각보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다. 눈이 그친 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네오는 가게로 들어가고픈 욕구를 억누른다. 드디어 때가 왔다. 빙글 돌아 길로 들어선 네오는 유유히 걷는다. 순간 반대편에서 문을 열고 누군가 나온다. 사로다. 빙고. 30걸음. 20걸음. 10걸음. 그리고

=털썩=

“이, 이봐요. 괜찮아요? 누구 없어요? 사람이 쓰러졌어요!”

차가운 눈 위에 얼굴을 박은 채 네오는 생각한다. 지금 이 어지러움이 내 연기 탓일까 아이면 실제상황일까? 하지만 확실한건 방금 내 얼굴에 와 닿은 차가움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 눈이라는 거야. 네오는 정신을 잃었다.



- 사 흘 -

의식이 돌아온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혼란스러운 기억이 하나 둘 자리를 잡아간다. 나는, 나는 네오 로스게이츠. 여기는 계획대로라면 페시네테 사로의 집? 정신을 잃어버리는 건 계획에 없었는데. 역시 북으로의 여행은 모험이었나. ‘따뜻하고 공기 좋은 곳에서 한 석 달 요양하세요.’ 재수 없는 주치의의 멍청한 목소리. 어쩌지? 나는 시키면 꼭 반대로 하는 습성을 타고났거든. 어쨌든 모험의 대가로……. 생각의 끝에서 네오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웃는걸 보니 정신 차렸네”

눈을 뜨자 세상이 찔러온다. 감각이 급속도로 회복된다. 네오는 머리가 아파옴을 느낀다. 세상이 빙글 돌다 사로에게서 멈춘다. 뭐야, 집에서도 검은 옷만 입어? 다시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좁은 집.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시피 한 덕에 내부는 넓게 느껴진다. 필요한 것 이외엔 아무것도 없다. 네오는 눈을 닫는다. 그래 일단은 성공이야. 네오는 입을 연다.

“으음, 여긴 어디? 당신은……. 어떻게 된 거죠?”

기다려도 대답이 없다. 네오는 다시 눈을 뜬다. 사로가 조용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어라? 왜 아무 반응이 없지? 네오의 눈에 의아함이 가득하다. 사로가 입을 연다.

“아는 사실을 말해 달라는 거야?”

“네?”

“내 집이고 내 방이야. 네 계획이 잘 진행된 결과지”

다 눈치 챈 건가? 순간적으로 변명을 하려던 네오는 말을 삼킨다. 여기서 뭐라 한들 더 비참해질 뿐이야. 계획변경인가. 자리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며 네오는 말한다. 쾌활한 어조다.

“어떻게 알았어요?”

“어렵진 않았어”

아름다운 목소리. 하지만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차라리 바위가 더 인간적이겠어. 네오는 침을 삼킨다.

“쓰러지길래 일으켜보니 낯이 익더군. 고전적인 방법이잖아, 네오?”

“그런데도 데려왔군요”

“진짜 정신을 잃은 게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 버렸을 거야”

입술이 바짝바짝 마른다. 변경이 아니라 폐기야. 네오는 힘겹게 말을 꺼낸다.

“어쩔 거죠?”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네?”

사로가 일어선다. 몸을 돌려 걸어가며 말한다.

“네 계획대로 넌 내 집에 왔어. 그 다음은 뭐지?”

“아……. 없는데요?”

돌아오는 답이 없다. 네오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보이지 않는 사람을 향해 네오는 말을 잇는다. 목소리는 여전히 유쾌하다.

“두 가지가 어긋났거든요. 하나는 내가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을 간과한거죠. 덕택에 이제 아무 계획 없어요”

돌아온 사로가 무언가를 내려놓는다. 컵이다. 김이 피어오른다. 따뜻한 물? 왜? 사로의 목소리는 차갑다.

“그럼 내가 결정해주지”

“에?”

“나가”

네오는 고개를 들어 사로를 마주본다. 검은 머리, 검은 눈, 하얀 얼굴, 빨간 입술. 시선을 내린다. 사로가 들고 있는 것은 자신의 외투다. 낭팬데. 고개를 돌린다. 시야에 창밖으로 내리는 눈이 들어온다. 아래를 본다. 컵과 따뜻한 물. 나가면 끝이야. 게임오버. 네오는 말한다.

“너무하군요. 아픈 사람을 눈 내리는 곳으로 내 쫓는 건가요? 어제 당신이 늦게 나와서 세 시간이나 떨었다구요”

“내가 알 바 아니야”

“지금 나갔단 또 쓰러질 텐데?”

사로는 말이 없다. 네오는 가만히 마주본다. 사로의 눈이 가늘어진다. 하지만 길게 내린 앞머리 때문에 네오는 감정까지 읽을 수는 없다.

“나중에 돈 내”

사로는 몸을 돌려 그대로 집 밖으로 나간다. 철커덩 끼익 쾅 철컥. 일단 된 건가? 네오는 한숨을 쉰다. 근데, 왜 반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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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는 이리저리 둘러본다. 눈이 나빠서인지 집 안은 빈틈없이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네오가 목표하는 물건은 어디에도 없다. 앨범은 고사하고 사진 한 장 없다. 타지인 인데 어째서 흔적이 하나도 없는 걸까? 네오는 자리에 주저앉는다. 어디서 온 거야? 그리고 어디로 간 거야? 네오는 미간을 찌푸린다. 사람들은 사로가 틈날 때면 호수로 간다고 했지만 이 추운 날 얼어붙은 그곳에 갈리는 없다. 날씨 생각을 하자 다시 기침이 나온다. 모험은 위험성이 있기에 매력적인거야. 네오는 미소를 짓는다. 예의 묘한 미소다.

“최대한 현재를 즐겨라”

네오의 움직임이 바빠진다. 왼 주머니에서 꺼낸 가루를 물에 녹인다. 한 입에 들이키고는 그대로 외투를 걸쳐 입고 집 밖으로 나간다. 철커덩 끼익 쾅. 컵 밑바닥에 가라앉은 흰 가루가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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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가 보는 세상은 아름답다. 심한 두통을 유발하긴 하지만 그 정도 대가는 아깝지 않을 만큼. 길가의 가로등은 더욱 크고 화려한 보석으로 흔들리고 발 바로 앞의 땅부터 파스텔톤 바다로 물결친다. 항상 꿈속을 걷는 듯한 사로에게 현실을 느끼게 해 주는 곳은 가장 비현실적 공간인 바다만큼 넓은 호수와 한없이 펼쳐진 설야다. 단색으로 이루어진 그 공간들은 사로에게 평안을 주는 몇 안 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안식처였던 곳을 향하며 사로는 머리가 아프다. 원인은 나쁜 시력 탓도, 갑자기 나타난 네오 탓도 아니다. 지금은 사로 자신이다. 사로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네오를 돌아 봤던 것. 길에서 데려온 것. 밤새 돌본 것. 그리고 쫓아내지 않은 것. 사로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다. 떠오르는 답을 애써 무시하며 사로는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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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왔어?”

“지금 뭐하는 거지?”

식탁 위. 타오르는 것. 반짝이는 것.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그 앞에 네오.

“몰라서 묻는 거 아니지? 재워준 게 고마워서 말이지 뭘 좀 만들어 봤어. 한번 먹어봐”

얼어있던 모래시계가 삐걱 인다. 이래서는 안 돼. 사로는 아무 말이나 꺼낸다. 내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왜 반말이야?”

“뭘, 너도 처음부터 그랬으면서. 페시네테 앉아봐, 어서”

사로는 네오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자신을 본다. 왜? 어째서? 사로는 혼란스럽다.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고 싶지 않다. 무의식이 발하는 경고보다 네오의 제안, 말, 손짓이 더 큰 힘을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 왜? 어째서?
시계는 빙글 돌고 모래는 흐르고 잠긴 상자의 문이 열린다.

“짜잔, 애플파이다. 맛있겠지? 내가 실력발휘 좀 했지”

의기양양한 네오에 비해 사로는 아무 반응이 없다. 의아한 네오에게 호흡 같은 사로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가”

“응? 페시네테, 뭐라고 했어?”

“...가”

“뭐?”

“ 나 가 ! ”

갑작스런 고함에 네오는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선다. 거의 비명소리다. 크게 뜬 네오의 검푸른 눈동자에 놀람이 가득하다. 뭐라고 말도 못한 채,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네오는 그저 서있다. 사로를 만나고 두 번째로 보는 감정의 격류.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네오는 머뭇머뭇 외투를 걸치고 문으로 걸어간다. 사로는 미동도 없다. 움직이는 건 촛불과 흔들리는 사로의 검은 그림자뿐이다. 문 앞에서 네오는 힘겹게 입을 연다.

“저……. 페시네테?” “나가!”

네오가 나갔다. 문이 닫혔다. 사로는 울었다.



- 나 흘 -

사로는 울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울고 또 울었다.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3년 전 그가 죽었을 때처럼 사로는 울었다. 그때, 울다 지쳐 잠들고 다시 깨어나면 우는 게 일상이었던 그때 그 고통을 잠재운 것은 시간이었다. 세상이 사라진 듯한 상실감도, 그 고통스러운 시간의 기억도 결국엔 단단한 상자에 들어가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그 위로 시간의 모래가 쌓여 감추었고 이곳 시실에 왔을 때 모래는 얼음이 되어 굳었다. 더 이상 아픔은 없었다. 그래서 사로는 모든 것을 잊었다고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네오가 왔다. 시계를 다시 뒤집는다. 사로는 막을 수 없다.
얼어버린 모래가 녹는다. 하나 둘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가라앉았던 상자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가 그토록 잘 만들던, 사로가 그토록 좋아했던 애플파이를 본 순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철컥. 잠겨있던 상자가 열렸다.
사로는 잊었다 생각한 감정과 기억들을 마주했다.
사로는 다만 울었다. 끝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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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하하하”

“그만 좀 웃어요”

“크흣, 하, 하지만 그게 말이지, 큭, 크하하하”

식사를 하기엔 이른 시간이고 술을 마시기엔 더더욱 이른 시간이다. 그래서 가게 안에는 네오와 주인과 가득채운 웃음소리뿐이다. 하도 웃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주인에게 네오는 잔뜩 볼멘소리로 말한다.

“그래서 얼마에요?”

“응? 뭐가?”

“제 요금이요. 졌어요 졌어. 아직 3일 남았지만 포기하렵니다”

“크하하. 내가 뭐라던가? 기다리게나, 장부를 가져오지. 크하하하”

멀어져가는 주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네오는 생각에 잠긴다. 페시네테, 페시네테 사로. 검은색 흰색 붉은색의 선명한 대비. 그리고 그 노래. 그런 말을 건네고 내기까지 하다니, 나에게 그런 기질이 있었나? 확실히 나 그때 취해있었나 봐. 술에든 노래에든. 네오는 쓰게 웃으며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마신다.

“자, 여기 370두가트 일세. 그 술값은 뺐어. 으하하”

네오는 품에서 지갑을 꺼낸다. 흘끗 주인의 눈에 족히 50장은 넘을 듯한 지폐가 보인다. 모두 고액권이다. 개중엔 1000두가트 지폐도 있는 듯 하다. 주인의 눈이 동그래진다.

“여기 1000두가트입니다. 떠나는 날까지 모든 요금을 대신하죠”

“허헛, 이거 너무 많은데. 나야 좋지만 말이야. 자네 부자구만?”

네오가 묘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슬픔, 아쉬움, 비꼼, 경멸. 수많은 감정이 뒤 섞여있어 주인은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그건 지금 네오도 마찬가지다.

“뭐……. 이제 좀 가뿐한 마음으로 마을이나 돌아보게. 생각보단 볼게 많아. 에 그리고 오늘은 날씨도 맑으니 별도 많겠어?”

그래. 단순히 내기에 진거야. 까짓것. 네오는 창 밖을 본다. 오랜만에 맑게 개었다. 넘어가기 시작한 해는 붉은 눈물을 흰 세상에 뚝뚝 떨군다. 내기는 졌어. 하지만……. 네오는 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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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는 눈을 떴다. 울다 지쳐 그대로 잠든 모양이다. 사로는 자신을 비웃는다. 그러나 웃음의 끝에서 한줄기 눈물이 흐른다. 사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사라졌다 생각했던 그 감정은, 그 슬픈 기억은 아픔은 더욱 깊고 짙게 되어 있었다. 최대한 지금을 즐겨라. 최대한 지금을 즐겨라. 지금을 즐겨라. 지금을, 지금을. 사로는 비명을 지른다. 그가, 바보 같은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사로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사로는 그가 절대 그 말을 지키지 못할 거라며 비웃었었지만, 마지막순간 웃었던 사람은 그였다. 그리고 아직도 과거에 매여 있는 사람은 사로였다. 사로는 그의 얼굴이 보고 싶다. 미치도록 다시 한번 보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사로가 가장 잘 안다. 마지막 한 장의 사진이나 그를 떠올릴만한 모든 것들을 태워버린 사람이 그녀 자신이기에. 3년. 시실에서 3년이 흐른 지금, 사로는 그의 얼굴을 생생히 그리지 못하는 자신에 슬픔을 넘어 분노까지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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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순식간에 져 버린다. 차가운 바람이 네오를 감싸고돌자 그의 기침이 심해진다. 쿨럭 쿨럭. 네오는 웃는다. 그는 걸음을 재촉한다. 달빛을 받아 더욱 희게 빛나는 눈 위에 뿌려진 별이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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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는 생각한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 그것은 외면이고 도피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거리두기였다. 얼어버린 모래는 얼 때부터 녹아 흐를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 사로는 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해결책이 아니라도 죽는 그 순간까지 도망치면 그만이야. 사로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하늘을 본다. 한줄기 차가운 바람이 사로를 감싸 그녀의 눈물을 거둔다. 사로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손끝도 명확히 볼 수 없는 사로에게 별이 비칠 리 없다. 사로의 하늘엔 별이 없다.

“페시네테?”

사로가 고개를 돌린다. 누구? 누군가 걸어오며 말한다.

“이번엔 말이야, 지지 않겠어”

뭐라고 하는 거지? 사로의 귀에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들리지 않는다. 누군가가 다가온다. 새파란 달이 그의 얼굴을 비춘다. 사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토록 보고 싶던 얼굴이 여기에 있다.

“내가 죽는 그날까지, 내 인생을 걸 테니까”

사로가 그의 품에 안긴다. 눈물 같은 말이 흐른다.

“네오”

네오는 고개를 든다. 셀 수 없는 별이 쏟아진다. 네오는 더욱 힘주어 사로를 안는다. 시리게 맑은 하늘이다.



- 닷 새 -

네오는 눈을 뜬다. 방 안이다. 저편 먼 곳에 문이 보인다. 네오는 걸어간다. 한 걸음 걸을 때 마다 온갖 물건이 나타난다. 그러나 네오는 눈길한번 주지 않는다. 문에 도착했을 때 그의 뒤로 거대한 산이 쌓였지만 네오가 찾는 것은 없다. 문을 연다. 끝이 없는 긴 복도에 네오가 나온 것과 같은 문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네오는 하나하나 들어간다. 방마다 모든 것이 다 있지만 네오가 찾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네오는 거대한 문을 본다. 앞에 서자 스르르 문이 열린다. 거대한 정원이다. 환한 미소가 피어난다. 그러나 곧 네오의 얼굴에 실망감만 가득하다. 나무도 물도 새도 있지만 가짜 나무, 가짜 물, 가짜 새 뿐이다. 네오는 울고 싶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 의아해하며 손을 든다. 조그맣다. 채 10살도 되지 않은 듯한 아이의 손이다. 그래서 아이답게 네오는 운다. 세상이 떠나가라 울던 네오는 기침을 토해낸다. 숨이 막혀 꺽꺽거리면서도 격한 기침을 한다. 눈을 뜬다. 손이 크다. 스무 살은 돼 보이는 청년의 손이다. 그리고 그 손에 그려진 붉은 무늬가 네오를 즐겁게 한다. 생명이다.
네오는 눈을 뜬다.

“일어난 거야?”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 사로에게서 멈춘다. 왠지 익숙하다. 몸을 일으키던 네오는 머리가 띵하다. 신음이 새어나온다. 그리고 갑자기 고개를 들어올려 사로를 본다. 사로는 의자에 뒤돌아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다. 평온함을 가장한 그 모습을 보며 네오는 미소 짓는다. 깨자마자 말을 걸고는 모른 척 하는 체 하는 건가. 네오가 말한다.

“어제는”

“신경 쓰지 마. 나는 너를 봤던 게 아니니까”

하지만 내 이름을 불렀는걸. 네오는 말하지 않는다. 침묵. 서로 아무 말이 없다. 사로는 책을 읽고 네오는 창 밖을 본다. 거짓말. 사로는 책을 읽지 않고 네오는 창 밖을 보지 않는다. 사로가 적막을 깬다.

“전생을 믿어?”

“난 어제부터 운명을 믿기 시작했으니 전생도 믿을지 몰라”

다시금 침묵. 서로가 자신의 행동이 의미 없음을 깨닫는다. 사로는 책을 덮고 돌아앉는다. 네오는 시선을 거두어 발끝을 본다. 다시금 사로가 말한다.

“네오, 너는 누구지?”

“대답하고 서로 하나씩 질문하기 어때? 대답 못하면 지는 거고”

“좋아”

“나는 네오 로스게이츠. 로스게이츠 가의 차남. 흐음, 페시네테 너의 나이는?”

로스게이츠 가? 사로는 그 이름이 꽤나 익숙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스물다섯. 왜 이곳에 왔지, 네오?

스물다섯? 생각보다 어리네. 세살차이인가. 네오가 말한다.

“인생이 주는 예상외의 즐거움을 맛보기 위하여. 그리고”

“그리고?”

“페시네테, 너를 만나기 위하여”

드르륵. 사로가 의자에서 일어난다. 긴 앞머리 너머로 네오를 노려보던 사로는 방으로 들어가며 말한다.

“내가졌어”

콰앙. 네오는 빙그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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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맑게 개었었냐는 듯 눈이 쏟아진다. 바깥을 바라보던 주인은 미간을 찌푸린다. 해가 졌는데도 사로는 어제에 이어 오지 않는다. 그리고 네오도 어제 나간 이후로 소식이 없다. 다시 떠나간 건가. 주인은 다시 사로를 생각한다. 병이라도 난 겐가. 왜 안 오는 거지? 하지만 확인 할 방법이 없다. 사로에겐 전화도 없다. 그리고 친구라 할 만한 사람도 없다.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병적으로 기피하는 사로가 그나마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신임을 주인은 알고 있다. 쏟아지는 저 눈 때문에 오늘 못나오나. 주인은 다른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불만에 찬 저 손님들은 어떻게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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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났어, 로스게이츠”

“그래. 세계제일의 갑부, 로스게이츠 가”

사로는 네오를 본다. 어디에서도 로스게이츠 가와 네오를 이을만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미심쩍은 어투로 사로는 묻는다.

“귀한 집 도련님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난 차남이니까”

네오가 예의 그 묘한 미소를 짓는다. 사로는 그 미소를 안다. 한번 본적이 있기에. 잊을 수 없기에. 저건 어떤 감정이 담겨있거나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지막 순간 웃을 수 있었던 그처럼 후회가 담기지 않은 미소다. 언제든 다시 웃을 수 있는, 자신에게도 웃을 수 있는 그런 미소다. 사로는 다시금 눈물이 날것만 같다.

“그리고 이건 요양이야. 난 병이 있어서”

“요양? 이런 곳으로?”

“나을 생각이 없었거든. 뭐랄까, 목표도 꿈도 없었다고 할까. 그거 알아? 내가 사람들과 가장 많이 만나고 대화한 게 언젠지. 그건 바로 내가 치료받느라 의사와 간호사들을 만날 때 였어”

사로는 아무 말 없이 네오를 본다. 네오의 목소리에는 슬픔도 외로움도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즐거움뿐이다.

“그래서 생각했지. 이 기회를 최대한 즐기자고. 그래서 도망쳤어. 몸이 가는대로. 기차가 있으면 기차를 타고 버스가 오면 버스를 타고. 아니면 그저 걸었어. 그래서 이곳 시실에 도착한거지. 그리고 이제, 나 돌아가야겠어”

네오는 사로를 마주본다. 여전히 보이는 거라곤 긴 앞머리와 붉은 입술뿐이다. 하지만 네오는 그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한다.

“이제 낫고 싶어졌어. 나아야겠어. 왜냐하면 너를 만났으니까. 그리고 돌아올게. 그러니 떠나는 김에 부탁이 있는데”

사로는 여전히 미동도 없다. 네오는 사로에게로 걸어가며 말을 잇는다.

“다시 올 때까지 나를 기다려주지 않겠어? 그리고 그때 대답해줘. 나와 이곳을 떠날 건지 말이야. 그리고 또 하나는”

네오는 사로 앞에 앉는다. 초가 흔들리고 사로의 그림자도 흔들린다. 말을 맺는다.

“나를 위해 한곡만 불러주지 않을래?”

사로도 네오도 더 이상 말이 없다. 다만 서로 마주보고만 있다. 초가 흘린 눈물이 산을 이뤄 초가 그 눈물을 다시 마실 때 까지. 내리는 눈 너머로 힘겹게 떠오른 희미한 달이 가라앉기 시작할 때 까지. 사로가 입을 연다. 호흡처럼 슬픈 노래가 흘러나온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사로는 노래를 한다.

<Fly me to the moon. And let me play among the star.
Let me see what spring in like on Jupiter and Mars.
In other word, hold my hands.
In other word, darling kiss me.>

네오가 사로의 손을 잡는다. 사로의 호흡을 삼킨다.



- 엿 새 -

눈이 쏟아진다. 네오는 멍하게 앉아있다. 밖을 내다본다. 집 안에는 네오뿐이다. 사로는 네오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어디론가 나가버린 모양이다. 떠나기로 한 사람은 떠나야지. 네오는 씩 웃는다. 따뜻하게 데운 물에 왼 주머니에서 꺼낸 가루를 녹인다. 이제 몇 개 남지 않았다. 떠난 지 3개월이 넘었는데 왜 안돌아 오는지 망할 주치의, 속이 타고 있을 거야. 헷, 내가 북쪽으로만 계속 돌아다녔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네오는 문을 나선다. 철커덕 끼익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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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쏟아진다. 시실에 온 이후로 눈이 가장 많이 내리는 날이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이 눈발을 헤치고 역이 있는 마을까지 갈 생각을 하니 네오는 벌써부터 막막하다. 잠잠하던 기침이 다시금 심해진다. 어쩌겠어, 마을이 내게 올 일은 없을 테니 내가 다가가는 수밖에. 발을 잡아당기는 눈의 손길이 묵직하다. 네오는 걸음을 이어가다 격한 기침을 한다. 울컥. 흰 눈길에 토해진 핏덩이가 붉다. 흰색에 붉은색. 꽤나 익숙한 대비인데. 네오는 머리가 띵하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몇 걸음 더 비틀거리던 네오는 그대로 쓰러진다. 털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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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쏟아진다. 네오는 눈을 뜬다. 지독스레 춥다. 빙긋 웃는다. 얼어 죽지 않았다니 기적이군. 네오는 일어선다. 아니 일어서려 한다. 그러나 일어서지 못한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팔 다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느껴지지 않는다. 네오는 고함을 지르려 한다. 그러나 얼어버린 목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기침할 힘조차 없다. 자신의 숨소리가 피리소리 같다. 네오는 있는 힘을 다해 일어서려 한다. 그러나 반쯤 몸을 일으키고는 그게 끝이다. 숨 쉬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할 수 없지. 누군가 지나가다 발견해 주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네오는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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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쏟아진다. 하지만 감각이 마비되어서인지 눈은 더 이상 차갑지 않다. 차가운 것은 몸 안쪽이다. 심장을 향해 조금씩 사기가 뻗쳐오는 것이 느껴진다. 이대로 죽는 건가. 날씨 탓에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자마자 거두어 가는가. 네오는 웃으려 하지만 얼어버린 안면근육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네오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저 서서히 죽어갈 뿐이다. 숨소리가 가늘어진다. 그때 네오의 귀에 무엇인가 들린다. 발자국소리. 네오는 힘겹게 눈을 뜬다. 누군가 다가온다. 네오는 기쁨과 실망과 안도감을 느낀다. 사로다. 사로의 눈에 길 한편에 쓰러져 눈에 덮여있는 자신이 보일 리 없다. 네오는 안다. 그래도 괜찮아. 마지막 순간 다시 봤으니. 네오의 의식이 희미해진다. 사로가 다가온다. 네오의 눈앞을 지나친다. 언제나 길게 드리웠던 앞머리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래서 네오는 사로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사로는 미소를 띠고 있다. 사로가 네오를 지나간다. 마지막 따스한 숨결과 함께 네오의 얼굴에 한 줄기 눈이 녹는다.



눈은 쏟아진다.






- 2005. 3. 4. pm. 5 : 42 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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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따로 떨어진거 지우고 하나로...
어짜피 올려 놓은거 정리해 놓고 싶었어요.

이거, 3월에 눈이오는 정말 신비로운 계절에
고3이 된 자각은 저 멀리 던져두고 봄방학 학교와서 자습하라는데
옆에 앉은 애가 미친놈 보듯 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쓴 글입니다. 으하하.

그냥, 그래요.  나중에 음... 한달이나 두달 더 지난후에
정말 제대로 퇴고해서 다른 사이트 문학제에 올려볼까나 하고 있답니다.
괜찮아요. 거긴 한번 할때 100~200편 신청하니까, 제 글 파묻혀서 안보일거에요
으하하~ 그러니 덜 부끄러울..

그럼, 시험기간 나름대로 할 일 없는 네모Dori 였습니다아.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