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다.
나의 제국은 한달을 꼬박 말을 달려야 그 끝에 도착할 만큼 넓다.
나의 백성은 하루에 열명씩 만난다면 그 모든 백성을 만난 후 다시 그만큼의 백성이 새로 태어날 정도로 많다.
나의 병사는 그 모두가 동시에 발을 구르면 성벽이 무너질 만큼 많다.
나의 재화는 세다가 머리가 셀 정도로 쌓여 있다.
나는 왕이다.
원하는 것 얻지 못한 것이 없고 얻을 수 없는 것이 없다.
나는 왕이다.
그래서 고독한 나는 왕이다.
아침이 밝아온다. 시종들이 다가와 나를 치장한다. 지겨운 하루의 시작이다. 가져온 음식은 너무나 많아 다 맛이나 볼 수 있을까 의문스럽다. 조례에 나열한 자들의 태반은 내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자들이다. 그들은 나를 당연히 알아야 하나 나는 그들을 당연히 모른다. 나는 이제 이 모든 것이 지겹다. 지친다. 여기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오늘도 이런 저런 말을 듣고 이런 저런 명령을 내린다. 저 너머의 어느 나라가 감히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한다. 군사를 보내라 한다. 남쪽 어디의 지방에 홍수가 났다 한다. 책임관리를 임명하고 그 지방을 보살피라 한다. 동쪽 어디의 지방에 유래 없는 풍년이 들었다 한다. 물자의 소통에 힘써 그 이익이 주변으로 퍼지도록 힘쓰라 명한다. 그들이 하는 말에 내가 답할 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들이 1을 말하니 내가 2를 답한다. 이 나라는 내가 다스리고 있는가, 아니면 저들이 다스리고 있는가.
오늘도 밤늦게 궁을 빠져나가 본다. 아직 해가 지기 전에 나섰음에도 거리에 도착하자 이미 한밤이다. 주막을 찾아 들어간다. 백성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그들은 100년 만에 찾아오는 태평성대라며 즐거워한다. 모두 입을 모아 나를 칭송하며 나를 성군이라 부른다. 나의 만수무강과 제국의 영원한 발전을 기원하며 술잔을 든다. 그들이 말하듯 나는 성군인가. 나는 잘 해나가고 있는 것일까. 이미 나에게 주어진 짐을, 나는 잘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는 듯 보일 때 나는 더욱 자신감을 잃어간다.
나는 오늘도 악몽에서 깨어난다. 언제나 같은 꿈이다. 꿈속에서 나는 허수아비다. 수많은 새들이 나를 쫓아와 쪼아댄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의 임무는 하나, 논을 지키는 것. 새들이 나를 쪼으매 곡식은 영글어간다. 농부는 나를 대견해 하고 곡식은 나를 고마워한다. 하지만 언제나 나는 새들에 쪼일 뿐이다. 그리고 곡식이 영글어 수확하는 날, 농부는 나를 뽑아 짚으로 나를 태운다.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서. 농부와 곡식의 웃음 속에서 난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다. 나는 허수아비다.
나는 새로운 부인을 맞이한다. 6번째 부인이다. 신하들도 백성들도 심지어는 부인들도 내가 더 많은 부인을 맞이하여 더 많은 자식을 가지기를 원한다. 그들의 요구에 내가 답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들이 1을 말하면 나는 2를 대답하는 것이다. 나는 6번째 부인을 맞이한다. 그런데 그녀는 다르다. 여태까지의 그녀들과 다르다. 그녀의 눈에는 생기가, 불꽃이 살아 있다. 그녀의 입가엔 지어내지 않은 그대로의 미소가 걸려 있다. 어째서? 어째서 너는 왜?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의 삶에는 생기가, 타오르는 불꽃이 느껴진다. 내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강물이라면 그녀는 어디로 불어갈지 모르는 바람이다.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가만히 멈추었는가 하면 이미 저편에서 춤추고 있다. 이 거대한 궁성에서 살아 숨쉬는 존재는 그녀뿐이다. 나 또한... 살아 숨쉬고 싶다.
어전회의다. 신하들이 말한다. 사려 깊게 듣는다. 1에 2를 답해줄 필요는 없다. 3을 말해도 4를 말해도 심지어 10을 말할 수도 있다. 왜 예전엔 이를 몰랐을까. 나는 왕인데. 서쪽의 어느 나라가 조공을 보내며 항복을 청했다 한다. 군사를 보내어 짓밟으라 한다. 하나도 남기지 말고 가지고 올 수 있는 것은 가지고 오며 가지고 올 수 없는 것은 남겨두지 말라 명한다. 북쪽의 어느 지방에 폭설이 내렸다 한다. 관리를 임명하여 도로를 정비하고 사람을 뽑아 눈을 가져와 저장할 방도를 마련하라 한다. 내 차가운 별미를 먹을 것이다. 남쪽 어느 지방에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즐거워한다 말한다. 일찍이 홍수가 났을 시에 나라가 도와준 바가 크니 세금을 더욱 거두어 들여 국고에 보태라 한다. 나의 제국이 나에 따라 움직인다. 나는 왕이다.
나는 궁성 밖으로 나간다. 변복을 한 채로 주막에 들어선다. 백성들이 술을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다. 왕이 변했다느니 모든 문제는 여우같은 후궁 때문이라느니 목청을 높여가며 떠든다. 장단을 맞춰주며 끼어든다. 변해버린 세상을 저주하며 술잔을 부딪친다. 쭈욱 들이키는 그자의 목을 친다. 놀라서 쓰러진 자들에게 나의 정체를 밝히고 마주 미소지어준다. 돌아서는 찰라 부엌 문가에 사색에 질려 서 있는 소녀가 보인다. 공포에 질린 그 모습이 아름답다. 따라온 호위병에게 그 소녀를 끌고 오라 이른다. 나는 왕이다.
나는 꿈을 꾼다. 나는 곡식이 영글어 가는 들판에 서 있다. 미소 지으며 나는 들판의 가에 선다. 불을 놓는다. 누렇게 익어가던 곡식은 붉게 타오르며 검게 날려간다. 타오르는 불과 바람과 곡식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미소 짓는다. 너른 들판을 달리던 불도 점점 사그라진다. 검게 변해 버린 들판엔 더 이상 태울 것이 없다. 불을 놓아 보지만 더 이상 타오르지 않는다. 두 손을 펼쳐본다. 검은 들판마냥 손도 검다. 그 한없는 검음에 비명을 지르며 나는 잠에서 깬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창 너머 밤하늘을 본다. 달빛이 나를 비춘다. 두 손을 펴 바라본다. 은빛으로 물든 손이 눈앞에 있다. 나는 웃는다. 내가 지른 불이 들판을 가로질러 달릴 때의 희열을 떠올리며 나는 웃는다.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덮는다. 웃고 있는 얼굴 위로 눈물이 흐른다.
나는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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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클 민폐인생 두번째..첫번째는 불참.
주제는 "추한 선(善), 혹은 아름다운 악(惡)"
덧. 오랜만의 실피르넷에 올리는 글이군요..하하하. 모두 저를 잊지 마셔요 ㅠ_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