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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게시판

[짧은글] 그래서

2007.03.26 06:58

네모Dori 조회 수:64849




  '아- 그럼 잘가'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

무거운 손을 들었다 내린다. 물에 흠뻑 젖은 듯한 다리를 들었다 놓는다. 조금씩 빨리 걷는다. 걸음이 뜀박질이 된다. 차가운 밤 공기 사이로 희게 부서지던 숨결이 소리가 된다.

  '제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너무도 멀다.



철컹 철컹 철컹 철컹. 단조로운 지하철의 비트를 타고 이어폰에선 나얼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흔들리는 머리 속에선 오늘의 일들을 조용히 되짚는다. 한번, 두번, 세번. 횟수가 손가락을 넘어서자 갈 곳 없어진 열한번째는 소리가 된다

  '제길'

휴대폰을 꺼내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바텐더는 오늘도 친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낸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렇겠지. 새로 온 사람에게도 친근한 목소리로 인사한다.

  '옆에 분은 누구?'

  '후배에요'

썬셋이 이토록 달콤했나. 그레나딘의 달콤함속에 데킬라가 숨었다. 숨어버린 데킬라는 분침도 함께 데리고 숨어버렸다. 2시간 동안 무슨 대화를 나눈걸까. 확실한 건 말하지 않았다는 것.

  '제길'

어두운 밤 거리에 마음을 담아 뱉는다.



멍하니 서성이다 문을 열어본다.

  '안녕-'

  '아- 여기 있었네'

세마디를 더 넘기지 못하고 흩어지는 화제들. 더이상 어디서 모아와야 할런지도 모르겠는데. 꼭 술을 마신 다음날 아침마냥 입안이 깔깔하다. 뱉어내지 못하고 맴도는 말. 말. 말.



시선이 소용돌이를 그리며 돈다. 시간은 나를 중심으로 반시계방향으로 회전한다. 어지러움 속에서 너는 어디에 있지? 니가 보여야 나는 말할 수 있어. 아니 보이면 말할 수 있을까. 먼저 나를 둘러싼 이 벽부터 넘어서야 내 목소리가 너에게 들릴거야. 강철의 벽을 넘으려면 나는 땅을 파야지. 내 손엔 작은 모종삽이 들려 있어. 물컹물컹한 진흙은 얼마나 깊은걸까. 퍼내도 퍼내는 기분이 들지 않아. 이곳을 통과하고 나서도 말할 수 없어. 일단 지저분해진 내 몸을 깨끗이 씻어내야지. 흙 투성이인 머리는 깨끗하게 감고 말려서 스프레이도 뿌릴거야. 옷은 지난 주 새로 산 자켓을 입고. 그리고는 석양이 져야지 아니면 가로등이 발갛게 빛나던가. 그리고 그 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니가 혼자 서 있으면-



  '석우아 왜그래?'

니가 있다. 정지한 세상 속에 니가 있다. 멈춘 시간 안에 니가 있다. 나는 아직 강철벽을 넘지도, 진흙수렁을 파내지도, 깨끗이 흙을 씻어내지도, 다듬고 단장하지도, 새옷을 입지도 않았는데, 여긴 석양이 지는 곳도 주황빛 가로등이 빛나는 곳도 아닌데 니가 있다. 그 무수한  것들을 넘어서 나를 붙잡은 니가 있다.



  '미선아, 나는-'



시간은 멈추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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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폐인생 07년 7기 주제. "00을 넘어,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