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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게시판

다름

2008.11.13 04:06

네모Dori 조회 수:262534

다름


ⅵ. -α. 그와 그녀가.

 “웬일이야? 술 마시자는 말에 순순히?”
 “예전에도 딱히 피한 기억은 없는데?”
 “다훈씨 술 싫어하지 않았어?”
 “싫어하지는 않아. 그런데 왜? 학원에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학원은 늘 똑같지. 언제까지 똑같으려나, 모르겠어, 언제까지지?”
 “흐음?”
 “그냥, 요즘 좀 울적하네. 하암. 왜 이런데?”
 “뭐, 영은씨는 요즘이라기 보단 항상 이었잖아?”
 “뭐야 그게.”
 “어쨌든, 일단은 마시는 게 어떨까요?”
 “그건 괜찮다.”


1. 그. 학교에서 단상.

 다훈은 멍하니 교수를 바라보았다. 졸렸다. 새로운 경쟁시장과 기업들의 생존전략이 교수에겐 춤을 춰 가며 설명할 정도로 중요한 모양이지만 다훈은 상관없었다. 상관하기엔, 어젯밤의 술이 너무 과했다. 두통, 졸음. 그 속에서 다훈은 지난밤의 술자리를 생각했다. 좋았다. 분위기도 사람들도. 덕택에 간만에 꽤나 마셨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읽고 하는 사람들. 알고 지낸지는 꽤 오래인데 직접 이렇게 만나 본 것은 처음이었다. 개중에는 준 프로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다훈은 그저 좋은 글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일 나름이었다. 조선배가 아니었으면 결코 나갈 일이 없었을 터였다.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쭉 선배인 인연의 권유를 쉽게 거절하긴 힘들었다. 열 명 남짓이었다. 다들 조금씩은 안면이 있지만 끼리끼리 친한 듯 두서넛씩 이야기하는 분위기였다. 그 중에서도 조선배는 마당발인 듯 이리 저리 바쁜 몸이었다. 안 그래도 술을 마시면 말수가 줄어드는 터라 있는 듯 없는 듯 앉아있는 다훈에게 먼저 말을 건 쪽은 영은이었다. 밝고 경쾌한,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한 목소리. 좋아하는 가수인지 연예인인지, 낯선 사람들 속에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술은 달콤했고 이야기는 미소 속에 흘렀다. 강의가 끝나가는 모양이다. 어수선함이 다훈의 주의를 끌었다. 영은이란 이름 주위를 둥글게 헤매고 있는 펜을 갈무리하며 다훈은 노트를 덮었다. 다음 강의실은 어디였지? 일상은 어제처럼 지난다.


a. 그녀. 학원에서 단상.

 시간이 남았다. 그저 흘러가길 기다리기엔 조금 길었다. 자습시켜놓고 나 몰라라 하고 싶지만 결코 속편한 해결책이 아닌 것을 깨달은 지는 오래되었다. 그렇다고 일찍 마치고 교무실로 향하기엔 아직 경력이 모자랐다. 월요일에 15분. 영은의 선택은 ‘지난 주말엔 뭐했니?’였다. 무난한 해결책이었다. 학생들의 이런 저런 이야기 속에서 영은도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한참 위에서 바라보는 태양과 함께 일어나고, 뉘엿뉘엿 져 가는 해를 보며 뒹굴 거리는, 그런 주말은 아니었다. 술자리. 오랜만은 아니었지만 처음 본 사람과 그렇게 웃으며 이야기 한 술자리는 간만이었다. 술자리든 아니든. 가람, 혹은 다훈이라고 부르라는 그의 목소리는 조용조용하지만 귀에 잘 들어왔다. 말 수가 많지는 않아도 대화가 서툰 사람은 아니었다. 호감을 느끼는 걸가? 하긴,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싫은 점은 찾지 못했다. 어떤 사람으로 남을지는 몰라도 나쁜 출발은 아닌 듯 했다. 종이 울렸다. 아이들의 듣기 좋은 소란 속에서 영은은 백묵과 강의 노트를 갈무리했다. 다음은 몇 학년 수업이더라? 또 다시 하루가 흐른다.


ⅰ. 그와 그녀가 만나다.

 “안녕하세요? 이름이, 김다훈? 맞아요?”
 “아, 예. 음, 죄송하지만 그쪽 이름은 모르겠네요. 제가 사람 이름을 도통 못 외워요.”
 “영은. 나영은이에요. 저도 이렇게 나오는 일은 잘 없지만, 그쪽은 처음이신가 봐요?”
 “네. 좀 낯설군요.”
 “금방 익숙해질 거예요. 누구랑 같이 나오셨어요?”
 “저기 저쪽에 머리 긴-”
 “아! 연이씨가 데려왔구나.”
 “아세요?”
 “뭐, 그럭저럭 이요. 연이씨가 발이 워낙 넓잖아요?”
 “하하하.”


2. 그. 비속의 데킬라 +라임.

 창문을 활짝 열었다. 종일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던 스피커를 끄고 빗소리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찬장에서 꺼낸 유리잔에 큼지막한 각얼음을 채우고 지난 달 알바비와 바꾼 데킬라, 호세쿠엘보를 따랐다. 그 위로 라임과, 스터. 방 한 면, 책상 위를 모두 차지한 큰 창문을 다훈은 이사 온 첫날 열어보고는 그 위로 블라인드를 내린 채 아예 창문이 없는 듯이 지냈다. 비가 내리는 날이 오기 전까지는. 보이는 거라곤 옆 건물의 투박한 붉은 벽돌과 귀퉁이 손바닥만 하게 재단된 하늘뿐이지만 지금은 그 창을 통해 끊임없이 빗소리가 쏟아지고 있었다. 창틀에 부딪히는 소리, 아스팔트위로 떨어지는 소리, 빗방울이 만나는 소리. 온갖 소리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훈은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투명한 황금빛. 차가움 속에 간직된 뜨거움. 한 모금 삼키자 가슴에서 퍼지는 온기와 함께 상큼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비로 조금 식은 몸이 기분 좋게 달아올랐다. 다훈은 무릎 위에 펼쳐진 책을 덮고 책상 위로 집어던졌다. 이런 날엔 체사레 보르자보다는 비와, 비가 오는 하늘이 더 좋다. 시원한 빗소리 사이에서 작은 초침 소리만이 시간이 흐름을 증거했다. 다훈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손바닥만 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혹은 그 너머를. 다훈은 그렇게 회색빛 하늘을 눈에 품과 빗소리와 함께 잠이 들었다.


b. 그녀. 비속의 보드카 +칼루아.

 영은은 기어코 찾아낸 우산을 침대 위로 집어던져 버렸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인데도 나가기가 싫어졌다. 오늘은 카페 대신 그냥 집에서. 따스한 담요. 푹신한 쿠션. 읽던 책. 핫 커피를 대신할 보드카와 칼루아. 그리고 BGM. 30여장이 넘게 꽂혀있는 CD장에서 이리 저리 헤매던 손이 창문으로 향했다.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거리 위의 빗소리가 방 안으로 옮겨졌다. 차가운 블랙러시안을 한 손에 들고 영은은 책을 폈다. 잠시 머뭇거리던 손끝이 자신감을 되찾고 차분하게 책장을 넘겼다. 빗소리로 가득 찬 공간에서 책장의 사각거림만이 홀로 자유롭다. 잔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영은의 손끝에 닿았다. 입 안에 머금은 블랙러시안엔 아메리카노의 향이 가득 담겨 있었다. 차갑지만 그 안에는 보드카의 불타는 심장이 그대로 뛰었다. 영은은 다 읽어버린 책을 놓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네거리의 소녀와 그 향기를 상상하며. 그래도 지금은 달콤한 아메리카노의 향이 좋아. 창밖으로 어느새 어둠이 가득하지만 비는 변함없었다. 점점이 피어난 가로등 붉은 빛이 내리는 빗방울을 비췄다. 두 팔로 무릎을 꼭 끌어안았다. 땅에서 피어난 별빛 위를 지나는 흔들림 들을 바라보며, 영은은 따스한 담요에 안겨 잠이 들었다.


ⅱ. 그와 그녀가 맥주를 마시다.

 “음, 나는 호가든!”
 “난, 그럼 레벤브로이로.”
 “레벤브로이?”
 “라벨이 마음에 들어서 좋아해요. 영은씨도 조금 마셔볼래요?”
 “그럼... 아, 조금 쓰다. 떫은가?”
 “나는 그래서 좋은데. 그렇다면 영은씨는 하이네켄 다크를 더 좋아하겠군요?”
 “오! 정답. 아사히도 좋아요. 깔끔하고. 약간, 음. 밋밋한 감도 없잖아 있지만.”
 “그건, 의왼데...”
 “응? 뭐가 의외에요?”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사람의 취향이 그런-”
 “뭐에요 정말!”


3. 그. 친구와 술.

 다훈은 웃으며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세 친구가 함께 잔을 내려놓았다. 각기 다른 억양이 그 뒤를 이었다. 김이 오르는 오뎅과 따끈한 정종. 조용한 이야기마다 잔잔한 웃음이 따랐다. 햇수로 오년이다. 기숙사, 하숙, 자취. 중간에 군대도 다녀오고. 어찌 연이란 쉽게 끊어지는 것은 아닌가보다. 20여 년 동안 서로 다른 곳에서 살다 모두 낯선 타향에서 의지할 이라곤 각기 이방인이 서로 뿐인 적도 있었다. 새로이 데워진 독구리가 나올 때마다 오가는 말은 조금씩 무거워져도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성격이다. 그리고 그것이 함께 하게 된 이유였다. 처음과 같은 것을 찾기란 어렵다고들 하지만 그런 성격은 오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다. 과거의 추억, 오늘의 실수, 미래의 걱정 따위를 오가던 이야기가 ‘그녀’로 바뀌었다. 가벼운 자랑과 웃음 띤 질투, 귀여운 엄살들 속에서 미소 짓는 다훈에게도 질문은 날아왔다. 넌 요즘 누구 없냐. 그저 웃는 다훈 대신 오른 편의 친구가 대답을 받았다. 요즘도 같겠지. 어디 나 좋다는 사람은 없을까? 웃음이 셋에게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열두시. 아직 거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술집마다 왁자한 소리들로 시끄럽지만 세 친구는 각자의 길로 나뉘었다. 오래 보아도 한결같은,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이 한참이었다. 길을 건너, 골목을 돌아, 골목을 지나 골목으로. 사람도 소란도 자취를 감춘 좁은 길에는 붉은 가로등뿐이다. 그러게, 왜 나 좋다는 이는 없을까. 가로등 따라 늘어진 그림자가 노래를 흥얼이며 걸었다. 달 보다 밝은 전구들 아래를 그렇게 쉼 없이.


c. 그녀. 친구와 술.

 비우고 채우기 무섭게 다신 잔을 들었다. 마치 그 동안 하지 못한 잔 들을 오늘 한 밤에 모두 해치워 버리려는 듯. 적당히 눈이 풀리고 혀가 꼬였다. 마치 오년 전 그때마냥. 대담한 듯 수줍은 웃음과 자유로운 표정, 몸짓. 아직은 걱정 아닌 걱정들로 밤을 새우던 그때처럼. 하루가 멀게 느껴지던 사이였는데 이제는 볼 때마다 오랜만이다. 얼마 만인지, 예전에 어땠는지,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기억을 떠올리기 힘들 만큼. 빈 병들을 흘러간 나날의 징검다리 삼아 옛 이야기 속으로 돌아갔다. 그랬었고 그랬었지. 걔는 요즘 어떻게 살까? 그때 우린 그랬는데. 서로 가졌던 다른 꿈만큼이나 다른 삶을 살아갈까 했지만 결국 지금 돌아보면 모두 엇비슷했다. 붓쟁이는 회사원이, 드럼은 간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영은은 글쟁이에서 학원 강사가 되었다. 요즘도 글은 쓰니? 열심히 시험문제 쓰고 있어. 마지막으로 서로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돌아가는 길은 멀고 어지럽다. 버스 창문 속의 나는 어디를 보고 있을까. 골목에는 불규칙한 가로등이 여기저기 손 가는대로 그림자를 그려댔다. 언덕을 오르는 영은은 셋이 되었다 또 둘이 되었다. 함께 걸어가 줄 이를 찾으려는 듯. 술에 취한 그림자들이 언덕을 올랐다. 그렇게 쉼 없이.


ⅲ. 그와 그녀가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하지만 역시 편하기는 문자잖아요?”
 “그렇긴 한데 좀, 가벼운 느낌이랄까.”
 “그래서 다훈씨는 내 문자에 항상 전화하는 거예요?”
 “뭐, 그렇죠.”
 “전화도 어색해하면서. 매번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잖아요.”
 “에, 역시 편지가 낫겠어요.”
 “편지?”
 “가볍지도 않고, 어색한 침묵도 없고.”
 “그런가?”
 “그리고 기다림이란 매력도 있고.”
 “흐음. 편지 쓰는 건 안 어색해요?”
 “...편지가 제일 어색하겠다.”
 “뭐에요 정말.”


4. 그. 당신에게.

 안녕. 편지를 얼마 만에 다시 써보는지 모르겠네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전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요. 어렵다 정말.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내 글씨를 보는 당신을 상상하는 중입니다. 푹신한 침대와 얼굴을 반이나 가려버리는 커다란 베개. 두툼한 이불은 어깨 위까지 끌어 올리고 엎드린 채 이 편지를 보고 있지는 않나요? BGM으로는 같이 보내는 두 번째 달. 저번에 잠시 이야기 했었는데 기억하고 있으려나? CD를 먼저 꺼내볼지, 아니면 편지를 먼저 읽을는지. 한 번 들어봐요. 난 정말 좋아하거든요. 아, 정말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 전화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흠, 요즘 날씨가 제멋대로죠? 조심해요. 또 아프지 말고. 튼튼하기론 산도 옮길듯한데 왜 그리 자주 아파요? 그러게 술 좀 줄이래도. 속병나기 전에. 하하, 농담. 화내지 말고 그러니 그만 아파요. 웃고 있을 때가 제일 보기 좋아요. 역시 2nd Moon. 흥얼거리면서 그만 여기서 접을까요?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도통 시작되지가 않으니. 다음을 위해 남겨둘게요. 답신 기다릴게요. 어두운 밤, 스탠드 불빛 아래서, 조용한 노랫소리와 함께 다훈이 쓰다.


d. 그녀. 너에게.

 안녕. 답장이 조금 늦었어. 요즘 너무 바빴어. 정말. 지금도 정신이 없어. 여긴 밤이야. 막 학원이 끝나서 돌아왔어. 내 방으로. 예전에 말 했었나? 우리 집은 2층인데 내 방은 3층에 있어. 지붕 아래 다락방이거든. 넓지는 않아도 부족하진 않아. 언제 보여주고 싶다. 처음 보면 정신없을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늘 그래, 도깨비가 열 명은 살고 있을 것 같다고.
 창밖으로 비가 오네. 집이 언덕 위에 있어서 야경이 참 좋아. 돌아오는 길은 좀 힘들어도. 비가 오는 하늘은 별로 사랑하지는 않지만, 괜찮네, 이것도. 우웅, 또 술 마시고 있어. 아, 이젠 정말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요즘은 정말 술 한 잔 안하면 잠이 안 온단 말야. 어, 하고 보니 뭔가 무시무시한 말을 해버린 것 같아. 헤헷. 그랑마니에르. 알아? 우유랑 섞어서 따스하게 먹으면 괜찮은데. 차가운 블랙러시안도 좋고. 너랑 저번에 갔던 그 바, 다시 가고 싶다. Soi 였나? 하이네켄 다크가 그리운데.
 아, 더 하다간 정말 의심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겠어. 여튼, 보내준 CD는 너무 잘 듣고 있어. 첫날에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다시 듣느라 밤새 한 숨도 못 잘 뻔 했어.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가만히 듣고 있으면 내 안에서 푸른 고양이 한 마리가 뛰어다니는 거야. 흰 고양이를 찾아서. 다음엔 푸른 고양이의 여행 이야길 들려줄게. 감기 조심해.
 여기는 비가 내리고 있어. 달이 뜨지 않는 밤에, 영은이.


ⅳ. 그와 그녀가 노래를 듣다.

 “두 번째 달 괜찮던데? 그런 노래 좋아해?”
 “뉴에이지? 재즈? 그냥 그런 장르 구분 보다는 흥얼거리는 노래를 좋아해.”
 “흥얼거리는?”
 “산들산들 부드럽게 헤엄치는 기분?”
 “헤에, 어렵다. 다훈씨 취향도 참 특이한데?”
 “메탈리카를 좋아하는 여자도 흔하진 않아.”
 “어머, 한국에 메탈리카 여성 팬이 얼마나 많은데.”
 “난 외국 밴드는, 글쎄, 가사를 이해하기가 힘들어서. 이야기도 중요하거든.”
 “그럼 또 누구들이 좋아?”
 “자우림, 넬, 그리고... 이적? 등등-”
 “언니네 이발관은?”
 “언니네 이발관?”
 “좋아할 것 같아.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거든.”
 “아! 그리고 노브레인도 사랑해!”
 “...뭐야 그건.”


5. 그. 밤 산책과 음악.

 짐은 적을수록, 없으면 없을수록 좋다. 그래도 가방은 꼭 필요하다. 다훈은 누가 뭐래도 CD플레이어가 좋았다. 휴대폰에도 음악 재생 기능이 있고 MP3플레이어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전자사전도 음악 재생이 되지만 다훈은 CD를 고집했다. 새 것보다는 옛 것이 좋은 취향 탓도 있고, MP3를 변환할 때의 귀찮음도 한 몫 담당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온전히 하나를 듣는다는 기분이 좋았다. 책장을 지나 책상 위까지 이리저리 널린 앨범들 사이에서 선택된 것은 넬의 walk through me.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미아’를 들으며 다훈은 스스로의 선택에 만족한 채 길을 나섰다. 여느 때처럼 목적 없는 이런 밤 산책에 그야말로 어울리는 BGM인걸. 가볍게 흥얼이며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골목과 골목을 비추는 붉은 가로등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학교다. 아직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나오는 학생들. 농구하는 사람들. 잔디밭에 나란히 앉은 연인들. 달이 뜬지 한참인데 여전히 학교는 사람으로 붐볐다. 학교를 지나 도로를 따라 언덕을 올랐다. 두어 개쯤 버스 정류장이 다훈을 지나쳤다. 흥얼흥얼. 좁은 자취방이 감당할 수 없게 넓기만 한 날에, 옆을 지나는 자동차가 더 따스하게 느껴지는 때에, 모르는 거리와 간판이 더 익숙한 밤에. 아직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Empty’. 마지막 트랙이 끝났다. 아직 채 흩어지지 않은 리듬에 맞춰 신발 코로 보도블록을 차 본다. 이제 돌아갈 때인가 보다. 미련 없는 걸음걸이가 온 길을 다시 되짚어간다. 음악이 흐른다. ‘미아’부터 아마‘Empty'까지.


e. 그녀. 카페에서 음악.

 볕이 따스했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었다. 사람이 많이 찾는 가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장 인기 있는 자리니까. 비어있지 않으면 그냥 돌아온 적도 있었다. 언니의 웃음에 미소로 자리에 앉았다. 따뜻한 머그컵을 앞에 두고 책을 꺼내 벽을 쌓았다. 이제는 나만의 시간. 이곳은 나만의 공간. 기껏 펼쳐놓은 책은 그닥 읽고 싶지 않았다. 카페에서 흐르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따금 지나는 사람들. 이따금 지나는 자동차. 창문 위로, 창문 밖으로. 저 아래 땅 위로 점이 하나 둘 피어났다. 점들이 조금씩 면이 되고 선들이 하나씩 공간을 채웠다. 비가 내린다. 영은은 턱을 괴고 물끄러미 비를 바라보았다. 커피의 따스함으로 한기를 몰아냈다. 아메리카노의 여운이 입 안에 남았다. 저 비 사이에서 푸른 고양이 한 마리가 영은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비와 비 사이를 피해 다니며 흰 고양이를 찾는 푸른 고양이. 날렵하게 휜 꼬리를 세우고 경쾌한 발걸음을 놀렸다. 푸른 돌과, 푸른 꽃과, 푸른 새를 지나 푸른 숲 속을 헤맨다. 고양이가 멈춰 섰다. 고양의 특유의 조심스러움으로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영은을 보았다. 가만히 마주보던 영은이 감았던 눈을 떴다. 음악이, 멈추었다. 언니가 새로운 CD로 바꾸었다. 창 밖에 비는 멎었다. 영은은 갈색 노트를 꺼냈다. 다시 음악이 흐른다. 영은의 손끝에서 이야기가 갈색 노트로 옮겨졌다. 푸른 숲에서 푸른 고양이가.


ⅴ. 그와 그녀가 밥을 먹다.

 “잘 먹네.”
 “응?”
 “많이 못 먹을 줄 알았어. 말랐잖아.”
 “호리호리하다고 해줘. 뭐 그쪽도 마찬가진걸.”
 “응?”
 “엄청나게 먹을 줄 알았어. 통토...활기차잖아?”
 “뭐야 그게. 여튼 맛있어?”
 “맛있어.”
 “다행이다.”
 “당신이랑 먹는데 맛있지 않을 리가 없잖아.”
 “뭐야 그게...”
 “게다가 얻어먹는 거고.”
 “...사실은 그게 제일 중요하지?”
 “들켰나? 오늘의 영은씨는 날카로운데?”
 “정말 뭐야!”


6. 그. 꿈 이야기.

 바람이 불었다. 물결은 잔잔하다. 깊이는 알 수 없다. 물이 흐른다. 배도 함께 나아간다. 혼자 누워 있기에 전혀 좁지 않다. 나무가 옆을 지나간다. 무언지 알 수 없지만 나무일테다. 왜 혼자, 배를 타고, 흘러가고 있을까. 중요하지 않다. 아무렴. 따스하다. 하늘이 푸르다. 왜 혼자 흘러갈까. 중요하지 않다. 그런 건. 춥지 않다. 나뭇결이 아름답다. 뱃전 위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간지럽다. 왜 혼자일까. 서늘한 기운이 몸을 파고든다. 팔짱을 끼고 일어나 앉았다. 나무. 나무들이 지나간다. 그 옆에 사람이 있다. 아는 사람이다. 누굴까? 이곳을 바라보면 알 수 있을 텐데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아니다. 누군지 알고 있다. 영은을 불러야 한다. 불러야 하나? 말이 나오지 않는다.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배는 계속 흘러간다. 멈출 듯 한 시간 속에서 고민은 영은을 지나치지 직전이다.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 돌릴 것이다. 영은이 이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고민이 왜 필요하지? 아, 바로 지금.
 다훈은 잠에서 깨어났다. 축축해진 손바닥을 비벼 닦았다. 어두운 방 안에 초침 소리만이 가득했다.


f. 그녀. 꿈 이야기.

 바람이 불었다. 발 끝. 양 팔. 왼편. 오른편. 머리 위. 앞. 뒤. 아무도 없다. 나아가는 쪽. 나아간 쪽. 아무도 없다. 무서운 속도로 지나간다. 나무. 나무들. 섬뜩한 초록색. 아래는 물. 오로지 물. 깊은 푸른색. 어두운 보라색. 고개를 숙인다. 무릎을 끌어안는다. 물방울. 뱃전을 넘어 목을 스친다. 흠칫한다. 차갑다. 더욱 강하게 팔을 당겼다. 무서운 물소리. 멈추지 않는다. 이곳은 아무도 없다. 여기에도 아무도 없다. 고개를 든다. 누군가 있다. 저기 저편. 다가올 곳에. 몸을 일으키다 차가운 물방울에 멈춘다. 나아가지도, 주저앉지도 않는 어정쩡한 자세로. 저 편에 그가 있다. 이곳을 바라보지 않는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바라봐줘. 나를 불러줘. 손을 잡아줘. 몸은 굳어버렸는데 강물은 멈추지 않는다. 배는 나아간다. 저 편의 그를 향해. 조금 후면 만날 텐데. 그리고는 멀어져 갈 텐데. 지나쳐버리면. 그가 고개를 돌린다. 돌릴 것이다. 배는 지나친다. 지나칠 것이다. 지나치려 한다. 아. 말이 되지 않은 소리가 흘러나온다. 아. 그녀를 본 그가 눈을 뜬다. 달린다. 강을 향해. 뛰어든다. 울고 있는 그녀를 향해. 그는.
 영은은 잠에서 깨어났다. 스며드는 한기에 이불을 끌어 올렸다. 어두운 방 안에 초침 소리만이 가득했다.


ⅵ. -β. 그와 그녀가.

 “뭐야. 역시 오늘도 나 혼자 이야기하는 것 같아. 뭐, 이젠 익숙하지만 도대체 다훈씨는 만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먼저 말하지를 않으니 알 수가 없어.”
 “무슨 생각... 고민하고 있었어.”
 “고민? 무슨 고민?”
 “뭐라고 말해야 할까 같은.”
 “응? 뭔데?”
 “고민은 안해야 할 것 같아.”
 “응? 무슨 말이야?”
 “그래야 한다는 느낌이 들어.”
 “뭐야. 취했어? 취한 척 하는 거야? 거의 마시지도 않았는데. 왜 혼자 말하고 혼자-”
 “영은씨.”
 “으, 응?”
 “손을, 잡아줄래?”
 “어? 갑자기, 뭐하게?”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말이 필요 없는 행동을 생각 중인데?”
 “...정말, 뭐야 그게.”
 “사랑해 영은아.”

 

 

 

08.10.15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