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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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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6 04:33

조회 수:2032

"어째서?"

복부를 관통당하고도 웃으며 물어본다. 괜스레 미안함이 든다. 하지만 일에는 사심이 들어가있어선 안 된다. 그것이 일이다. 칼 끝에 묻어져나온 선혈이 바닥에 쌓인 하얀 눈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찔러놓고서 감상에 젖다니! 인간으로서 할 일은 아니다.

"말하지 않으면, 죽을때 억울해지잖아."
"……."

아무 말 않는 게 상책이다. 괜히 마지막에 여유를 부리며 모든 전말을 얘기해주다 실패하는 것은 삼류 악역들이나 하는 짓거리. 적어도 난 삼류는 되고싶지 않다. 그렇기에 선택한 가장 적절한 대답은, 묵념이다. 아무런 말도 하지 말자. 난 피곤할 뿐이지만 그는 생사를 넘나들고 있다. 그가 아무리 끈질겨도 이제 더 이상 버티진 못한다. 그렇게 자신을 고무시키며 난 상대를 철저히 무시한다.

"말하기 싫다는 거군."
"……."

드디어 체념한건가! 그는 포기했다는 듯한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하지만, 그는 끈질긴 자다. 마지막까지 절대 방심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방심할 수 없을 정도로 끈질기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도… 어쩌면 그가 느끼고 있는 배신감과 관련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관련이 있다. 갑자기 씁쓸해진다.

"눈과 진눈께비 중 어떤 것을 더 좋아해?"
"……?"
"진눈께비는 그를 밟는 상대에겐 짜증과 불쾌감을 선사하지."
"……."
"그렇기에 사람들은 눈을 더 좋아해. 보기에도 훨씬 좋지? 그 하얀 눈 말이야."
"……."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죽기 전의 잡소리라 생각하고 귀를 닫아버려야 하건만, 아까 느낀 씁쓸함에 기인한 것인지, 귀를 닫지 않는다. 그의 헛소리에 내가 의문을 나타내자, 그는 계속 말을 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유언이 되겠지.

"분명 시꺼멓고 질척거리는 진눈께비는 불쾌감과 더러움이 묻어나지."
"……."
"그래, 좋은 기분만 선사하는 함박눈에 비하면…"
"……."
"……."
"……."
"……."
"…끝난건가."
"……하지만 말이야, 그것이 자신을 무참히 밟은 자에 대한 그만의 보복일지도 몰라."
"……!"

끝이 아닌가! 나는 칼을 쥐고 있는 손에 더더욱 힘을 준다.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한데도, 뼈와 살이 분리되는 고통을 맛보고 있을 텐데도, 그는 웃으며 계속 말을 잇는다. 정말 지겨운 녀석이다. 빨리 죽지도 않고 뭐 하는 것인가! 순간 불안한 느낌이 든 나는 그에게 질문이란 걸 해버린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그러자 그가 날 비웃으며 -피식거리는 아주 짧은 웃음이었다.- 평상시와 같이 말한다.

"그래서, 나도 따라해보려고."
"……!"

젠장! 이건 또 언제…! 역시 이녀석의 말장난따위를 듣는 게 아니었어! 이런 가증스러운 녀석…. 언제부턴가 난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나를 이렇게 만든 모든 것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컷! 오늘은 이정도로 해 두고, 나머지는 내일 마저 찍도록 하자!"
"예!"

감독의 외침에 기다렸다는 듯 스탭들이 일사불란하게 귀가하기 시작한다. 오늘자 연극은 이걸로 끝인가…. 집에 가서 발이나 닦고 잠이나 자야지. 내일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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