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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유시인 이야기

2005.04.03 21:02

네모Dori 조회 수:1657

음유시인 이야기



봄이 돌아왔다. 리벨이 다시 흐르고 히디안 숲에는 벚꽃이 흐드러졌다. 따스한 봄볕아래 산들바람에 실려 온 아카시아 향에 취한 한 노인이 수금을 타고 있었다. 길고 아름다웠을 손가락에는 세월이 새겨놓은 자국이 잔뜩 새겨져 있었지만 유유히 현 위를 움직였다. 60을 바라보게 된 나이 탓일까. 아니면 봄볕의 마력 탓일까. 오른손을 허리 즈음에 던져두고 눈은 지그시 내려감은 채 노인은 졸기 시작했다. 그때 저 편 길에서 경쾌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의 예민한 귀는 눈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도 그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소녀가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 속으로 미소 지으며 편안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카스텔, 이렇게 이른 아침에 나를 다 찾어오구 무슨 일이냐”

“아! 피이. 라프 할아버지 사실은 눈 뜨고 계셨군요?”

나이에 비해선 아직 젊다고 생각했던 목소리인데 카스텔의 목소리가 잇달아 들려오자 영락없이 노인의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돼버린 것 같은 느낌에 라프는 웃으며 눈을 떴다. 붉은색이 감도는 풍성한 곱슬머리는 카스텔을 더욱 작고 어려 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카스텔. 이렇게 좋은 날씨에 씨어와 놀러나가지 않고”

“에헤헤. 사실 가고 있었는데요, 노랫소리가 들려서 왔어요. 웬일로 연주를 다 하세요?”

“따스한 봄 아니냐. 이런 날은 정말 좋지. 안 그러냐?”

“그래서 말인데요, 노래 한곡 들려주세요, 할아버지. 에헤헤헤”

노래라. 라프는 난처한 듯 웃었다. 연주도 아니고 노래를 해 달라니.

“씨어한테 안가구?”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요 뭘”

라프는 빙그레 웃었다. 젋었을때나 지금이나 부탁에는 약했다. 특히 여자의 부탁에는. 자세를 갖춰 잡고는 조율하듯 현을 퉁겼다. 무슨 노래를 할까나. 흰 구름을 바라보던 라프의 푸른 눈동자가 스르르 감기더니 손가락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꽤나 복잡한 기교가 연속해서 이루어지는데도 서툰 기색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곳에 낮으면서도 맑게 울리는 목소리가 더해졌다.

<< 어디를 흐르나 알 수 없는 길
   꽃 치고 새 울고 낙엽위로 눈은 나리고
   아무도 없는 길에 밤이 내리면
   타오르는 모닥불과 따스한 별빛
   희미한 안개 속에 감춰진 내일은
   내일의 발걸음 설레게 해도
   눈 감고 있으면 마음속에는
   다른 하늘, 같은 별을 바라는
   그 나무 아래 앉은 너의 모습을 >>

카스텔의 두 뺨이 복숭아 빛으로 물들었다. 씨어도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는 사과 빛으로 물들어 간다. 라프는 미소 지었다. 흐려졌지만 여전히 깊은 푸른 두 눈을 보며 카스텔이 말했다.

“할아버지는 정말 노래 잘 부르세요”

“허허허. 이정도 노래 솜씨는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래도 라프 할아버지가 마을에서 노래를 제일 잘 부르시는걸요? 유모도 그랬어요”

꼬마 소녀의 솔직한 찬사에 라프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 노래의 주인에 비하면 달빛 아래에 반딧불이란다”

“노래의 주인?”

“그래.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이 바로 그 제스트란다”

“아”

전설적인 음유시인의 이름을 듣자 카스텔은 짧은 탄성을 내었다. 제스트 해저드. 수많은 모험담의 주인공이자 처녀를 유혹하는 청년들의 세레나데는 대부분 제스트의 작품이다. 나름대로 독서광답게 카스텔은 수많은 제스트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지만, 그의 이야기는 끝이 없는 것만 같았다. 이 노래도 처음 듣는 노래이고.

“이야기 해 주세요”

“응? 무슨 이야기 말이냐?”

“제스트의 이야기요. 저 모르는 걸로. 에헤헤”

이제는 이야기인가. 라프는 허헛하고 웃었다. 어쩐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그 만큼 야비해지는 법이다.

“이야기는 몇 알지만 꽤나 긴걸. 씨어와 못놀텐데?”

카스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버렸다.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답게 카스텔은 속마음을 감추는 것이 서툴렀고 그 예쁘장한 얼굴위로 수많은 고민이 스쳐지나가는 것이 그대로 비쳤다. 그래서 그 모든 모습을 보아버린 라프는 더 이상 발뺌할 수 없었다.

“그럼 제일 짧은 걸로 해주세요”

라프는 허허 웃으며 안락의자에 편안히 몸을 기대었다. 발 앞 잔디에 무릎을 모우고 앉은 카스텔을 보며 라프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스트의 짧은 모험담들은 잘 알고 있겠지만 왜 모험을 떠났고 왜 사라졌는지는 들어보지 못했지? 그래. 잘 듣거라. 너도 알고 있듯이 제스트는 드라클 태생의 고야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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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잇-하”

언덕 아래로 내 달리며 제스트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 상쾌한 바람은 땀이 흐르는 대로 날려버렸다. 더욱 상쾌했다. 내달리던 그의 눈에 그녀가 보였다. 얼굴 한가득 미소를 띠며 제스트는 더욱 빨리 달렸다. 멧돼지라도 달려오는 듯한 소리를 눈치 채지 않을 리 없었고 고개를 돌리던 그녀는 멧돼지를 본 것 보다 더욱 놀라버렸다.

“어, 어머나”

“이이잇-하!”

달리던 그대로 제스트는 데굴데굴 굴렀다. 푹신한 잔디위에 구르다 반동으로 몸을 튕겨 일으키며 착 하고 곧추 세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풀잎에 범벅이 되어서는 10점 만점이지 하고 선 제스트의 모습에 그녀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커다란 눈동자에는 아직 놀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웃음을 터뜨리느라 괴이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제스트도 웃었다. 웃음이 웃음을 낳았고, 결국 둘은 크게 웃었다.

“아하하하하”  “까르르르르”

바람은 시원하고 날씨는 화창했다. 둘레가 세 아름은 될 듯한 거대한 포플러나무 아래서 어린 두 연인은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열일곱, 열여섯. 우정이 아닌 사랑을 분명하게 느껴가는 나이. 그들은 분명 연인이었다.

“제스트. 오늘은 표정이 무척 밝은걸? 무슨 좋은 일 이라도 있었어?”

“아, 뭐……. 좋은 일이긴 한데”

“응?”

“에, 발터 그 영감이 드디어 허락했거든”

밝았던 그녀의 얼굴에 순간 그림자가 드리웠다. 내면의 동요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그대로 비춰졌다. 하지만 예상했던 일인걸. 알고 있었잖아. 언젠가 오리라는 걸. 그녀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래. 이제 떠날 때가 온 거지”

“어, 언제 갈 건데?”

“지금”

“지금?”

계속 쾌활하던 제스트도 태도가 바뀌었다. 언제나 장난처럼 들리던 약간 높은 톤의 목소리가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절대 그녀가 거부할 수 없는 어조로 제스트는 말했다.

“옛날부터 말해 왔었던 거지. 난 떠나야 돼. 떠날 거야”

“안가면 안돼? 확실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나는 떠날 거야”

“그냥 여기서 나랑 계속......”

“그러지마.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잖아”

그녀의 큰 눈망울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고개를 떨구는 그녀를 보며 제스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한점 없는 정말 푸른 하늘이다.

“너는 자작님의 외동딸이고 나는 치, 귀족의 피가 흐르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무것도 없는 고아일 뿐이야. 이대로는 아무것도 되지 못할 거야”

“하,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잘 설득시킬 수 있어. 아버지도 제스트를 좋아하시는걸”

“그리고 내가 용서하지 못해. 이런 나 자신을 말이야. 그러니까 난 떠날 거야. 기회가 있는 곳으로. 난 자신이 있어. 꼭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어 돌아올 거야”

제스트는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마주보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결국은 잡지 못할 거란 걸. 하지만 보내어 줄 수도 없는 걸. 그래서 그냥 미루고만 싶었는데.

“돌아올 거야. 나에겐 분명 재능이 있어. 난 할 수 있어. 3년이면 어떻게든 될 거야. 너에게 부끄럼이 없는 짝이 되면 그때 당장 이 나무 밑으로 돌아올게. 그때까지만 나를 기다려줘”

떠나는 사람은 남겨진 후회도 떠나야 한다. 제스트는 일어섰다. 여전히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스트는 몸을 돌려 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리고 돌아보지 않았다. 발소리가 멀어져가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아롱졌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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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에, 그래서요?”

“제스트에게는 재능과 노력이 있었지. 그리고 행운도 있었단다. 모든 일이 성공의 연속이었어. 눈의 여왕의 마음을 녹이고 하늘의 탑을 오르고, 달의 섬에 가 닿는 등 수많은 모험을 했고 점점 더 유명해져갔지. 그리고 드디어 그의 인생을 바꿔버릴 일에 말려들게 되었어. 바로”

“헨켈 삼황자의 도피와 재 황위 탈환 사건”

“하하하. 그래. 헨켈 삼황자가 황위에 오르자 제스트는 백작이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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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스트는 힘차게 말을 달렸다. 11년 전 걸어갔던 그 길은 말을 타고 되짚어 가자 길고 힘들었던 그 여정은 너무나도 순식간이었다. 떠날 때는 보잘것없는 고아였지만. 돌아오는 지금 그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광대한 백작령. 황제의 오른팔이자 친구. 대륙 방방곡곡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의 모험담과 대륙 제 1의 검사라는 칭호. 어느 누군가가 그를 향해 부족하다 말하겠는가. 제스트는 더욱 힘차게 말을 달렸다. 시간이 너무도 많이 흘렀다. 길어도 5년이면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아니, 따지고 보면 이렇게 성공한 것은 세상의 편애일지도 몰랐다. 여행을 시작하고 4번째 눈을 맞이하는 날. 제스트는 동료이자 친구인 헨켈이 삼황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 순간은 대륙 제 일의 음유시인이 검사이자 천재전략가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한 가지 목표만을 바라며 치달린 5년은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를 나날이었다. 사흘 낮 사흘 밤의 전투 막바지에 제스트가 마침내 숙적인 헨리 공작을 쓰러트렸을 때, 헨켈은 황제가 되었고, 제스트는 영웅이 되었다. 돌아보니 기약은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그래서 이미 늦어버린 약속이기에 조금 더 너그러워 졌던 걸까? 전후에도 할 일은 산더미였고 2년이 그렇게 훌쩍 지나갔다. 하지만 11년 내내 제스트는 단 한시도 그녀를 잊지 않았다.
마을은 축제 분위기였다. 바깥쪽에 말을 매어둔 채 제스트는 천천히 걸었다. 군데군데 낯익은 사람들이 보였지만 아무도 제스트를 알아보지 못했다. 10여년, 그 중 5년간은 치열한 전투 속에 살아온 제스트의 얼굴엔 17살의 그 앳된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에. 크고 맑은 푸른 눈동자도 악동의 그것이라기 보단 재치 있고 유쾌한 사람이란 인상을 주고 있었다. 떠들썩한 축제 바깥쪽에 자리 잡고 제스트는 물었다.

“커다란 축제군요. 무슨 경사라도 있습니까?”

“어? 자네 낯이 익은데. 여행자인가?”

“뭐, 그런 셈이죠. 여기가 초행은 아니구요, 하지만 워낙 오래간만이라 아무것도 모르겠군요”

“그래? 왠지 본 듯한 얼굴이긴 한데 잘 기억이 안나는구만. 자, 자네도 한잔 들게”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래 무슨 일인데요?”

“아아, 헤이스팅스 남작님께서 아들을 보셨다네”

“헤이스팅스?”

처음 듣는 이름에 제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헤이스팅스? 우리 자작님이 아니시네. 남작? 새로운 영주님이 부임하셨나? 치열한 내전은 수많은 귀족을 사라지게하고 또 탄생시켰다. 자작과 남작이 넘쳐나는 시대였다.

“아, 자네 헤이스팅스 남작님도 모르나? 거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영주님 외동딸과 결혼하신 분이라네”

“아, 그렇군요”

빙그레 웃으며 맞장구쳐주던 제스트의 표정이 갑작스레 덜커덕 하고 멈췄다. 누구와 무엇을? 제스트는 튕기듯 일어나 고함질렀다. 감추고 있던 위엄과 권위가 그대로 표출되었다.

“뭐라! 누가 무엇을?!”

“어엇, 영주님 따님과 겨, 결혼을 했다고 말일세. 그 이름이 뭐더라, 어, 어라? 자네 어디 가는가? 이보게!”

제스트는 달렸다. 쉬지 않고 달렸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든 말든 달렸다. 믿을 수 없었다. 직접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절대 믿을 수 없었다. 직접 듣기까지는 믿을 수 없었다. 다 거짓말이야! 어떤 경우라도 나는, 내가! 그때 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제스트?”

그를 불러 세운 것은 여상한 노인이었다. 하지만 제스트에게 그는 평범한 노인이 아니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 그를 키워준 사람.

“발...터?”

“쿨럭. 돌아온 게냐 제스트? 아니 이젠 해저드경인가. 네 소식은 잘 들었다. 쉬지 않고 끝없이 전해지더구나. 그래 뜻한 것은 다 이루었구나”

제스트는 발터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토록 탄탄하던 몸이 이제는 죽어가는 고목 같았다. 그러나 제스트에겐 그런 것들은 느낄 여력이 없었다. 그의 사고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제스트는 다그쳐 물었다.

“그녀는? 그녀는 어떻게 된 거죠?”

“쿨럭 쿨럭. 이렇게 물어본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일 텐데?”

“그녀는?!”

“이제 와서 무엇을 어떻게 더 알겠다는 거냐. 무엇이 더 달라지기에. 그녀의 남편이라도 내 쫓고 대신 들어가겠다는 거냐? 이미 다 끝나버린 일을”

제스트는 비틀거렸다. 발터의 마지막 말이 그의 남은 모든 기력을 흩어버렸다. 그 치열한 전쟁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가 주저앉았다. 아니 쓰러졌다. 바닥에 고개를 묻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에게 발터는 조용히 말했다.

“3년, 3년이 지나고부터 그녀가 이곳에서 기다리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 너의 이야기는 줄기차게 전해졌지만 그건 먼 곳의 이야기였지. 더는 견딜 수 없었을 게다. 영주는 늙어가고 자신은 외동딸. 3년. 그리고 3년. 그렇게 석삼년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래 그게 한계였을 테지. 전쟁이 끝나도 영웅은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리고 작년이 마지막이었다”

“그런가요. 그렇군요. 그래요”

제스트는 일어섰다. 포플러나무는 여전히 크고 싱그러웠다. 그러나. 제스트는 몸을 돌렸다.

“또 어디로 가는 게냐?”

“길을 따라서, 더 이상 길이 없는 곳 까지”

발터도 몸을 돌려 걸어갔다. 넓어져가는 간극에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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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냥 그렇게 떠났어요?”

“아니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제스트는 도저히 그냥 떠날 수 없었지”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마냥 기다렸단다.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른 채 제스트는 마냥 기다렸지. 별이 떠오를 때 까지 포플러나무에 기대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걸어왔지”

카스텔은 숨도 못 쉬고 이야기에 잔뜩 빠져있었다. 소녀가 뿜어내는 긴장감과 기대감에 취해 라프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 그녀였어. 결혼하고 아들까지 낳았지만 그녀도 제스트를 잊지 못했거든. 11년만의 재회지만 둘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지.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인지한 후에 그들은 단 한걸음도 움직이지 않았어.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멍하게 바라만 보던 제스트는 몸을 돌려 달려갔지.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단다”

“11년만의 재회인데 왜 아무 말도 안했을까요?”

“글쎄. 그것을 누가 알겠니. 하지만 추측은 해 볼 수 있겠지. 왜 그랬을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아서? 그 제스트가? 그래. 그건 아닐 거야. 그럼 뭘까. 그건 바로…… 제스트가 알아 버린 게지”

“무엇을요?”

“그가 위한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지킬 수 있었던 약속을 미루고 미뤘던 이유는 결국 욕심 때문이었지 그녀를 위한 마음도 없진 않았겠지만…… 그래, 그래서 결혼한 후에도 자신을 기다리는 그녀를 보았을 때 아무 말도 못하고 달아난 것이지”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아무도 모른단다. 그녀를 떠난 후 제스트는 사라졌어. 영지에도 수많은 친구들에게도, 황제 에게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지. 정말로 그가 한 말처럼 걷고 걸어 길이 없는 곳 까지 갔을는지도……. 하지만 한 가지가 더 남아있단다. 그건 그가 마지막으로......”

카-스-테-엘-. 먼 곳에서 누군가가 소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두 번째로 들렸을 때 라프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카스텔도 알 수 있었다. 엉거주춤 일어서던 카스텔의 얼굴엔 또다시 무수한 고민이 흐르기 시작했다. 라프는 빙긋이 웃으며 표정을 찬찬히 읽어나갔다. 남은 이야기를 마저 다 들을까. 아니면 안 오는 자신을 찾아 나선 애인의 부름에 답할까. 라프는 생각의 끝에서 다시 미소 지었다. 그리고 눈앞의 꼬마연인을 돕기로 했다.

“씨어가 부르는구나. 가 봐라.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해 주마”

“네? 하지만”

“기다리게 하면 못써요. 미움 받는다?”

다시금 볼이 바알갛게 달아올랐다.

“하, 할아버지두. 그럼 다음에 꼬옥 마저 들려주세요?”

“허허, 그래그래”

카스텔은 왔던 길을 그대로 달려갔다. 씨-어-야-. 라프는 다시 웃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정말 많이 웃는다고 생각했다. 30여년 만에 처음 가지는 행복 같았다. 봄볕은 따스했고 바람은 여전히 향긋했다. 놓았던 수금을 당기며 라프는 아직 누군가가 듣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계속했다.

“한 가지가 더 남아있단다. 바로 제스트가 마지막으로 불렀다고 전해지는 노래지. 하지만 그 노래는 제스트가 10여 년간 부른 노래와는 많이 달라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제스트가 부른 게 아니다, 라고 말하기도 한단다. 그래도 나는 그것은 제스트의 노래라고 생각해. 그토록 다른 이유는…… 그녀를 떠난 그 순간부터 그는 제스트가 아니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아니 그렇다면 그건 제스트의 노래가 아닐지도 모르지”

손가락이 움직였다. 몇 개의 높은 음을 튕겨내더니 단조롭고 슬픈 음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듣는다면 그 단조롭고 단순한 멜로디에 초보자의 연습곡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음악가가 듣는다면? 그것은 결코 쉬운 노래가 아니었다.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미약한 변주가 곡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섬세한 움직임이 곡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지독히도 슬픈 곡조였다. 수금이 울음을 터뜨리듯이.

<< 새는 날아가네 너를 찾으러
   별은 떠오르지 너를 비추려
   흐르는 눈물 속에 네 모습 새긴
   나는 떠나가네 너를 남기고
   부는 바람은 쓸쓸히 차고
   길 너머 저편은 끝없는 어둠
   죄 지은 영혼에 안식은 없다

   새는 노래하네 그곳 하늘에
   별은 빛날 테지 그곳 창가에
   흐르는 눈물은 그칠 날 없고
   나는 사라지네 그을음 속에
   어두운 하늘엔 별빛이 없고
   어디를 향해도 한없는 절망
   죄 지은 영혼에 안식은 없다 >>

멀리서 들려오던 웃음소리도 사라지고, 다시금 남은 것은 봄바람에 취한 나뭇잎들과 햇볕에 비명 지르는 새들, 그리고 라프의 수금소리였다. 노래가 끝났지만 연주는 그치지 않았다. 단지 서서히 느려져갔다. 노곤한 봄의 향취는 바람에 실려 지독히도 호리었다. 이제 라프의 손은 정지하고 정지함으로 연주했다. 긴 호흡보다도 느린 한 음이 기일게 꼬리를 끌었다. 닫히었던 입이 힘없이 열렸다. 한숨인지 노랫말인지 기인 꼬리에 실려 흩어졌다.

“나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흐르지 않았다. 봄볕은 여전히 따스하고 바람은 살랑거렸다. 라프의 눈이 힘겹게 열렸다. 길 저편은 한없이 멀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으리. 라프는 눈을 감고 30여년 만에 처음 찾아온 행복을 생각했다. 행복은 즐거움과 다르다. 라프는 숨을 내 쉬었다. 긴 음보다도 더욱 길었다. 58년을 달려온 연주가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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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텔과 씨어는 왜 이리 좋은걸까요? 계속 쓰고 싶어지는 캐릭터. 편앤가 봅니다.

읽어주신 분들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