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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게시판

[단편]-신의 검

2005.04.24 21:21

비령 조회 수:2032

-신의 검

“신이시여! 그대가 정녕 나를 버리시나이까?”
“신이시여! 그대의 용맹스러운 검을 이 어두운 무덤 한가운데 버리시나이까?”
녹슬고 부러진 검들이 모이는 곳. 그 한가운데에 무릎 꿇고 하늘을 향해 절규하는 백발의 사나이. 그의 눈은 에메랄드빛으로 번쩍이고 있었고 그의 갑옷은 여러 군데 금이 가 있었으며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신은 대답이 없다. 한 마디 조차 하지 않는다. 헛소리라도 좋고 기침 소리라도 좋다. 그저 신이 있다는 것만 증명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이 그의 질문에 답을 주리라.

-어리석은 자여. 신은 그대를 아끼지 않는다. 그저 잠시 그대를 이용했을 뿐.
“그대는 누군가! 저리 가라! 나를 현혹시키려 하지 마라! 나의 주인은 단 한분! 그분뿐이다! 나를 현혹시키지 말고 저리가거라!”
-그대는 정말 신이 그대를 아낀다 생각하나. 그래서 그가 자네를 이런 불길한 장소에 가두었나? 그러지 말고 나와 계약하자. 나와 계약하면 넌 그를 볼 수 있다. 그에게서 답을 들을 수 있다.
“···정말인가”
-정말이고말고. 걱정하지 말고 네 앞에 보이는 검을 잡아라. 그리고 외쳐라

달콤한 유혹이다. 신을 볼 수 있고 신에게서 답을 들을 수 있다니. 그가 바라던 바다. 왜 신이 그를 이런 불길한 곳에 집어넣었나. 그리고 5년이 되도록 그를 이곳에서 꺼내지 않는가. 그에 대한 답을 모두 들을 수 있다. 그토록 갈구하던 답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신이 그를 받아줄 것인가. 악마에게 현혹되어 그를 찾아간다면 과연 그를 맞이해줄 것인가. 천사들이 창과 방패로 그를 저지하지 않으면 다행이리라.

-잡아라. 그리고 계약하라. 너의 피는 이미 원하고 있다. 너의 몸에는 복수의 피가 흐르고 있다. 잡아라. 그리고 외쳐라. 단 한마디면 그대는 신을 볼 수 있다. 신을 초월 할 수 있다. 그대는 영웅이 될 수 있다. 후회는 나중으로 미뤄라. 지금은 그저 선택뿐.

고민된다. 검을 잡고 신을 볼 것인가 아니면 지금처럼 무릎 꿇고 신이 꺼내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그의 가슴으로 온갖 잡념들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단 한가지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도 처음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너무 낯선 감정이다. 이런 감정은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그가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그의 감정을 깨우치자마자 검을 잡았다. 그리고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걷게 되었다.

                                  ♠ ♠ ♠ ♠ ♠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의 축복입니다”
“그대는 신에게서 무엇은 갈망하는가?”
“영원한 생명과 끊임없는 노래입니다.”
“그대는 신에게서 무슨 존재이고 싶은가.”
“신의 곁은 떠나지 않는 한 자루 검 이고 싶습니다.”
검은 바탕에 금색 자수로 장식된 긴 로브를 걸치고 있는 보랏빛 눈동자의 노인.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있었다. 그가 입을 열면 감히 그 누구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그가 움직이면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반쯤 감긴 눈은 그를 인자하게 만들지만 굳게 다문 입과 이마에 있는 이상한 표식은 그를 괴팍하고 야무진 사람이란 걸 말해준다.
그런 그의 앞에 기사들처럼 무릎 꿇고 손을 모은 채로 앉아있는 소녀. 단정한 적색 생머리와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동자. 큰 눈과 작고 도톰한 입술은 그녀를 더욱 여자답게 한다.
노인은 성수로 적신 두건을 소녀의 머리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하얀색 실크에 레이스로 장식된 고풍스런 두건이다.
“이제 그대는 멀리 떠나”
“신의 노래를 전합니다.”
“신은 그대의 노래를 듣고”
“나에게 천사들을 보내십니다.”
“그대는 신의 검이자 악기이니 그대가 가는 곳마다 과실이 익고 축복된 영광의 길만이 열리리라. 힘든 여정도 신의 이름으로 이겨내고 아픔도 신의 가호로 모두 잊혀지리라.”
“나 셀리아스는 신의 검이자 악기 된 자로서 신의 가호를 영광으로 알고 그분만의 말씀을 듣겠나이다.”
“그대는 이제 가서 신의 부름에 답하라.”
“아크이움 세라나이”
짧지만 긴 미사가 드디어 끝났다. 방금 만월의 성인식을 마친 소녀는 혼자였다. 아무나 와서 축하해주기 마련인데 아무도 그녀의 곁에 있지 않았다.
슬프다는 감정은 없다. 어릴 적부터 쭉 그래왔으니까. 소녀는 웃고 있다. 마치 이래야 정상이라는 듯이.
소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성당 밖으로 향했다. 경쾌한 구두소리가 그녀의 뒤를 쫓는다.
“아레나이 아레나이. 움쿠스라나이. 아루마나 시게두나미....”
햇살이 환히 내리 비츠는 들판에 도착하자 소녀의 입에서 알지 못할 말이 뱉어져 나왔다.
그리고 소녀는 하늘로 올랐다. 소녀는 그녀의 큰 날개를 펼치고 그녀의 둥지로 돌아갔다.

                                 ♠ ♠ ♠ ♠ ♠

“신이여! 이것이 그대가 원한 미래란 말인가!”
“당신의 피조물이 죽는 꼴을 똑똑히 봐둬라!”
“땅이 그들의 피를 머금음을 잘 기억해두어라!”
“한때는 그대의 검이었던 내가 그대를 검으로 찢으려 한다!”
“한때는 그대의 팔이었던 내가 그대의 명령을 거스르려 한다!”
“한때는 그대의 지혜였던 내가 그대를 이용하려 함이다!”
백발의 사나이는 더 이상 백발이 아니다. 피로 물든 붉은색. 사람들의 한이 맺혀 있는 말 그대로 정말 붉은 핏빛이다.
그의 손에는 검이 들려있었고 검의 손잡이에는 마구 짓이겨진 사람형상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의 뒤에는 불길이 치솟았고 그 안에는 고통의 절규가 새어나왔다. 그는 저주했다. 이 세상 신이 만든 모든 것을.
“나는 신을 저주한다! 나를 만든 신을 저주한다!”
-그래 너는 신을 저주한다.
“나는 신을 죽이고 내가 신의 자리에 오르겠다!”
-너는 신을 죽인다.
“나는! 더 이상 신의 총애를 받던 그가 아니다!”
-너는 신을 저주한다. 너는 신을 죽인다. 그를 죽이고 너는 신이 되는 거다.
“더 이상 신의 검도 아니고 지혜도 팔도 아니다! 그저 신에게 검을 찌를 날을 기다리는 자다! 물러서라 인간들이여! 나를 방해하지 말지어다.”

그때였다. 그냥 흘려들을 수도 잇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하늘이 맑게 개이면서 한줄기 빛이 그를 내리 쬐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그분의 목소리. 그가 그렇게 갈망하던 신의 목소리 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더 이상 따듯하지 않았다. 감정이 없었다. 더 이상 그에게는 볼일이 없다는 듯 쓰레기처럼 내버리는 사람처럼 신은 감정이 없었다.

=그대가 나이기를 포기하겠는가.
나의 검이자 팔이자 지혜였던
그대가 나이기를 거부하겠는가.
나의 피조물 나의 혈육
그대는 운명을 거스르려 함인가.
억겁의 세월은 그대를 바꾸었는가.
유혹에 빠져 나에게 검을 들이미는가.
내가 그대를 버렸다 생각함인가.
그대를 어둠 속 무덤 한가운데 버렸다 결정지음인가.
어리석도다. 슬프도다.
어찌 나의 검이 나에게 죽음을 선포하는가.
애석하도다. 매정하도다.
죽음의 유혹에 나의 검이 빠졌음이로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 따위 말라 버린 지 오래 라고 굳게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가슴에서 뭔가 울컥하고 치솟는 게 느껴졌다. 감정 따위 잊어버렸다고 믿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검이 들린 그의 손이 천천히 그의 가슴께로 움직였다.

“아크이움 세라나이....”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욕하지 않는다. 그들의 가족과 친구 그 모두를 없앴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를 용서한다.
“죽어서는 신의 사랑과 은총을 받으시길...”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안다. 그는 그들의 아버지 세상의 창조주의 유일한 아들 이었다.
그런 그가 유혹에 빠져 신에게 검을 들이밀었다. 신은 용서해 주리라.
죽었던 그의 아들이 다시 돌아왔다. 이제는 행복하리라.
더 이상 혼돈은 없으리라.

                                   ♠ ♠ ♠ ♠ ♠

“몰아치는 폭풍 속에 모순 되는 빗방울
그대의 기억 속에는 외로움뿐 그 어떤 기쁨도 없네.
그대는 신의 악기이자 검
전장 속을 누비는 전사의 검
거리를 채우는 시인의 노래
외로움은 제치고 신의 축복을 바라는 자
눈물 따위 마른지 오래. 감정 따위 잃은 지 오래
검은 옷은 죽음을 붉은 눈과 머리칼은 탄생을
신의 축복을 바라는 자
신의 영광을 바라는 자. “

음유시인이 연주를 마치었다.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 그에게서 눈길을 때지 못한다.
낡은 류트와 군데군데 찢어진 로브. 간혹 비치는 그의 어두운 눈빛. 그리고 암청색 머리카락.
검만 차고 있었으면 검사라고 느껴질 정도의 체격과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 때문에 멈춘 것은 아니다.
그의 노래. 그가 거리를 채운 노래. 그것은 분명 신의 검과 악기인 세라나스의 노래이다.
그 노래를 어찌 그가 아는가. 그녀의 노래는 모두 델타나무 성전의 봉인의 철창에 있는데. 그 누구도 꺼내지 못하는데.
하지만 감미로운 곡조가 다시 한번 류트에서 꺼내지자 그들은 귀를 기울였다. 방금 전까지의 모든 잡념은 사라지고 음유시인의 노랫가락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는 어두운 세상이 가고 밝은 세상이 올 시간
아이들은 집에 들어가  어서 자려무나.
밝은 별빛이 들려주는 노래에 홀리면
아무런 약도 없다오. 귀를 잘 막고 자려무나.
북쪽의 호수. 얼음의 시카네가 돌고 도는 시간
달이 뜨고 태양이 지면 요정들이 모이는 시간
요정의 모습에 매료되면
그 누구도 사랑 할 수 없다오. 눈은 잘 감고 가시오.
태양이 뜨고 달이 지는 시간
요정은 집으로 별들은 우주로
시카네가 다시 얼면 세상은 다시 겨울 속으로
후슈마가 다시 오면 인간은 다시 파멸 속으로
지나가는 연인마저 돌아올 수 없는 이별 속으로
아크레인 아크레인 세낙아닥마이=

“신계서 항상 그대들과 함께 하기를..”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천천히 일어나 깊은 골목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아무도 그 길이 막다른 길이란 건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의 눈은 이미 올바른 것을 볼 줄 모르기에.
그들의 눈은 이미 없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