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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게시판

바람과 나무

2004.11.01 02:59

네모Dori 조회 수:1516





아침안개 너머로 태양이 떠오른다. 노오랗게 물들어가는 안개와 고요한 아침바다. 잔뜩 웅크렸던 모래알도 살며시 일어난다. 먹구름이 사라진 하늘에서는 폭풍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바다가 밀어놓은 부서진 배가 어제를 기억할 뿐. 어디선가 불어온 한줄기 바람이 안개를 가르고 햇살을 드리운다.

“이봐요, 살아있어요?”
“으음”
“정신 차려요”

아침 햇살이 머리 속 까지 새하얗게 태운다. 죽을 듯한 현기증에도 정신을 잃지 않은 것은 끔찍한 갈증 탓일까? 그의 머릿속에 어제의 기억들이 단편적으로 떠오르고 사라진다. 성난 파도. 바다의 외침. 방향성 없는 바람. 수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사라진다. 난 살아 있는가. 여긴 어딘가. 떠다니다 운 좋게 나무에 걸린 덕에 떠내려가지 않은 건가. 그는 힘겹게 숨을 토해낸다.

“물…… 물 좀 주시오”

갈라졌던 안개가 일렁이며 간극을 메운다. 노란 빛 무리가 밝아지며 엷어진다. 아침이 밝아온다.



그의 시선이 밖을 향한다. 작은 집에 더욱 작은 창문. 그러나 담고 있는 바다는 한없이 넓다.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에 눈이 시리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섬을 부드럽게 감싸고돌아 집안까지 들어온다. 상쾌하다. 나무에 기대고 선 그녀가 보인다. 한없는 바다를 바라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의 시선이 안을 향한다. 가구는 적고 작다. 철저한 실용주의. 하지만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 썰렁하다는 느낌은 없다. 장식 없는 벽은 그래서 시원하다. 그녀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일어나 있었군요”
“조금 전에요”

짧은 질문. 그리고 짧은 답. 한 달여 동안 돌보고 돌보아온 사이인데도 그들의 대화는 아직도 짧게 끊어진다. 그럼에도 딱딱하지 않음은, 고요함이 안온함으로 느껴지는 것은 한 달여 동안 돌보고 돌보아온 사이이기에.



“아직은 좀더 쉬세요”
“누워 있는 것도 힘들어서요”

항상 그녀가 서 있던 그 자리에 이제는 그가 앉아있다. 나뭇잎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릴 때 마다 그의 표정도 변한다. 무엇을 바라보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머리 위에서 내려보던 태양은 이제 시선을 낮춰 그들은 마주본다. 아래로 아래로. 그리고 붉게 붉게. 아직은 따스한 바람이 분다.

“어디에서 왔나요”
“모든 곳에서. 나는 떠돌이지요”

파도는 끊임없이 다가왔다 물러난다. 도달할 수 없는,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혼자 살아가나요?”
“지금은요. 하지만 섬 저쪽엔 사람이 많아요”

인적이 사라진 바닷가에 새빨간 달이 떠오른다. 푸른 파도가 희게 부서진다. 끊임없이 다가오지만 결국은 물러나고 만다. 푸른 파도가 희게 부서진다. 검은 하늘에 만월도 희게 부서진다.



돛이 바람을 머금고 운다. 바다를 바라는 노래. 웃음을 머금은 그의 얼굴은 완성된 그림을 바라보는 거장의 그것과 닮아있다.

“다 고쳤군요”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본다. 언제나처럼 나무에 기대선 그녀의 얼굴은 붉은 빛에 물들어 눈만이 검다. 일몰을 등진 그의 얼굴은 검어 표정을 읽을 수 없지만 눈만은 빛난다. 같으면서도 다른 감정을 담은. ‘나와 함께 살아요’ ‘나와 함께 떠나요’
배에 기대선 그와 나무에 기대선 그녀는 여전히 열 걸음. 그가 눈을 깜박이고 그녀가 눈을 깜박인다. 그들의 사이는 여덟 걸음. 여섯 걸음. 먼저도 없고 나중도 없다. 네 걸음. 두 걸음. 그가 그녀를 본다. 그녀가 그를 본다. 그녀가 그를 안고 그가 그녀를 안는다.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간격이 없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이상 서로를 바라 볼 수도 없다. 바다에서 불어온 차가운 바람은 파도를 스치고, 돛을 울리고, 나뭇잎을 흔들고, 그녀의 고인 눈물을 덜어준다.



상쾌한 바람이 분다. 맑은 하늘엔 구름 한점 없고 파도는 잔잔하다. 바다도 하늘도 너무나 푸르러서 멀어져가는 흰 돛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나무에 기대선 그녀는, 언제나처럼 바다를 바라본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무엇을 바라보는가.
섬을 감싸 안으며 노래하던 바람도 바다를 향한다. 아름다운 나무에 머물지 못한 바람은 새로운 꽃을 찾아 떠난다. 떠나가는 바람을 잡을 수 없는 나무는 불어올 바람을 기다린다.
언제나처럼 나무에 기대선 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바다인가 하늘인가.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