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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게시판

[상상연작 5회] 판도라의 상자

2005.02.04 05:45

네모Dori 조회 수:1977





-판도라의 상자-


「새장의 문을 열어본 적이 있나, 마법사?」
「열면, 다시는 닫을 수 없지」

-이영도, Polaris Rhapsody-




이 이야기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을 때의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판도라는 상자를 보았다. 매만졌다. 끌어안았다. 들어 올렸다. 12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7가지 색으로 빛나는 상자. 그녀가 받은 어떤 선물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뚜껑으로 향하던 손이 덜컥 하고 멈췄다. ‘열지 말아라, 열어보지 말아라, 절대로 열어보지 말아라’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소리에 초점을 잃어가던 크고 푸른 눈동자에 갑자기 검은 빛이 스쳤다. 결의에 찬 눈빛, 판도라는 두 번 다시 망설이지 않았다.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보석도, 금화도, 향료도, 그 무엇도 없었다. 상자에 있는 것은, 13형제 뿐. 상자가 열리는 순간, 세상의 빛을 마주한 순간, 가장 먼저 뛰쳐나간 것은 [순수]와 [분노]였다.


무언가 갑자기 뛰쳐나오자 놀란 판도라는 엉겁결에 손을 휘둘렀다. 그래서 [순수]가 그 연약하고 조그만 몸이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판도라의 날카로운 손톱이었다. 할퀴어졌다. 찢겨졌다. 그리고 죽었다. 끔찍한 비명에, 피로 물든 손에 판도라는 겁에 질렸다. 비명을 내질렀다. [순수]뒤에 몸을 숨겼던 [분노]는 크게 웃으며 날아올랐다.


다음으로 나간 것은 [사랑]과 [질투], 그리고 [음란]이었다. [순수]의 죽음에 겁먹은 [사랑]을 [음란]이 끌고 [질투]가 밀었다. 비명을 지르는 판도라를 스쳐 가뿐히 빠져나갔다. 그리고 뒤이어 [믿음]이 뛰쳐나갔다. 날아가는 [믿음]의 다리를 꽈악 붙잡고 [의심]또한 빠져 나갔다. 판도라는 하늘을 보았다. 검은 형체들이 둥둥 떠다녔다. 돌이킬 수 없었다. 울었다. 판도라는 울었다.


[대식]과 [탐욕]이 손을 맞잡고 유유히 빠져나갔다. 판도라를 비웃으며 [교만]과 [나태]가 날아올랐다. 판도라는 울었다.


그러나 상자에는 아직 [희망]이 남아있었다. [순수]처럼 찢겨질라, 상자위로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살폈다. 머뭇머뭇. 그리고 나서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잡아당겼다.

저항하는 [희망]을 넘어뜨렸다.

그 조그마한 머리를 바닥에 못 박았다.

비명을 지르는 [희망]을 내려다보며

피에 젖은 환한 웃음을 띠고 뛰어나가는 그는

[포기]였다.


판도라는 도망쳤다. 남편도, 선물도, 상자도 내버리고 달아났다.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절벽을 지나 심연으로 가라앉을 때 까지. 판도라는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그리고 달리지 않았다.


세상은 바뀌었다. 신들은 떠나갔다. 대지는 울었다. 인간은, 인간은 미소 지었다.
아기는, 그 티 없이 깨끗한 마음을 가진 아기는, 세상의 공기와 마주하는 그 순간부터 더렵혀졌다. 사라진 순수함을 채우는 분노에 겁먹고 울음을 터뜨렸다. 누구도 구원해주지 못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더렵혀졌다. 사랑은,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도 음란으로 시작되어 결국 질투로 끝나고야 말았다. 배신한 연인을 배신하고 죽이고 죽임 당했다. 절벽 끝에 선 두 사람은 친구든 친지든, 부모든 자식이든, 가장 믿는 사람일수록 의심은 더 커졌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신은,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결국 서로를 먼저 밀어버렸다. 나태에 잠식된 절제는 한낱 구호, 아무도 듣지 않는 헛소리. 두발로 대지를 짓밟고 하늘로 고개를 쳐든 인간은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보이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파괴했다. 죄는 더욱더 깊어가고, 구원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간혹, 그들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인간은 견딜 수 없었다. 찾아 헤맸다. 마지막 남은 빛, 아스라이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길잡이로 삼아, 인간은 희망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 앞에 찾아온 것은

포기 였다.

환하게 웃음 짓는 포기 앞에서 인간은 다시금 주저앉았다. 그들의 죄에 못 박혔다. 그리고 그 위로 수천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였다. 쌓여만 갔다.


분명히 희망은 있다.
보이고 들린다.
상자는 닫히지 않았다.
그러나
희망은 스스로 나오지 못하고
찾는 자에게 나타나는 것은
오로지
포기
뿐이다.
하지만 분명히
희망은 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