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풀려서인지 좀처럼 눈발이 그치지 않던 해로개쓰에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아마존의 우기쯤 된다면 짜증이 치솟을 지 모르지만 늙은이들도 10년에 한두 번 볼까말까한 겨울비는 의외로 환영의 대상이었다. 창 밖으로 어쩐지 구슬프게 내리는 비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마녀魔女 의사는 의사는 중얼거렸다.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눈이 날카로운 것이 딱히 미인이라 할 구석은 없었지만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아아, 이젠 될대로 되라지. 난 몰라~"
창 밖으로 내리는 비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소독용으로 구비해 둔 술을 홀짝거리며 마시다가 하얀 가루가 소복히 쌓여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제를 수십, 수백번은 한 가루이지만 독성은 여전히 강했다. 이런걸 쓰다간 병과 함께 목숨도 날아갈 것이다. 한숨을 내쉬며 다시 독성을 제거하기 위해 약을 조그마한 사발에 넣었다. 될대로 되라 했지만... 역시 신경쓰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이다. 그 강건한 육체가 쉬이 상할리는 없지만 그는 부상자고, 또 왕이다. 이건 뭐, 완전히 문책감이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도 이런 날에 왕께서..."
왕은 거리를 걷고 있었다. 바바리안은 별다른 요새를 건설하거나 하지도 않고 주거지에 적당한 크기의 촌락을 짓고 사는 일이 태반이다. 물론 다른 종족이라 한들 별다른 모습일리는 없다만은 펠러딘이라고 칭하며 자신과 믿는 바가 다른 자들을 학살하는 자. 또, 여인들을 마법의 길로 인도해서 파괴의 길로 빠트리는 종자들. 그런 자들이 있어서 완전히 안심할 바는 되지 못했다.
비를 맞으니 상처가 더욱 쑤셔왔다. 왕이 걸음을 재촉하며 거리를 빠져나갈 즈음, 웅크린 그림자가 보였다. 들개인가? 싶었지만 이곳은 해로개쓰다. 들개 같은것이 있을리가.
소년은 상처입었음에도 야수처럼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바바리안들 특유의 벽안碧眼에 검은 머리.
흔치 않은 순혈의 소년이었음에도 이리 방치되어 있었다. 자신은 잠행을 위해 길을 떠나려는 몸. 소년을 데리고 갈 수는 없다.
"...."
그렇다 해도 백성을 버리는 왕이 어찌 왕이랴. 왕은 조용히 소년을 안아들었다. 비쩍 마른 소년의 몸은 놀라우리만치 가벼웠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왕은 조용히 영지를 떠나갔다.
소년의 회복은 놀라우리만치 빨랐다. 배에는 자상刺傷으로 피범벅이 되어 있고, 상반신에는 채찍 자욱이 무성했다. 아마도 고아로 노예로 살아온 소년인 모양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다시 돌아올 수 있었겠지. 치료는 받지 못했지만. 하여간에 소년은 말을 하지 못했다. 흔히들 말하는 자폐아의 형태에 가까운. 치료가 끝나고 거의 상처를 회복해서 가물가물했던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왕에게 이빨을 들이대며 으르렁거렸다. 단순히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숫제 짐승의 행태였다.
팡-!
허공을 가르며 소년이 덤벼들었다. 또래라는 비교조차도 할 수 없는 강철마저도 우그러뜨릴 기세의 악력이 왕을 노렸으나 왕은 역전의 용사. 쉬이 당할 리가 없다. 가볍게 몸을 움직여 피한 왕이 소년의 목덜미를 쥐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왕의 눈이 소년과 마주쳐졌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듯한 두 눈이 소년의 시선을 놓지 않고 파고들었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그 눈. 그것은 차라리 증오보다도 두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소년 역시 지지않았다. 마치 짐승이 인간을 보는 듯. 무감하면서도 본능적인 살의가 왕을 노렸다.
"허어."
보통 녀석이 아니다. 생각하며 왕은 무심코 감탄성을 터뜨렸다. 이런 녀석이라니.
"나를 따라갈테냐?"
그 순간 소년은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복잡한 빛이 소년의 눈속을 유영했다. 그리고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녀석은 자신의 옆에 있다. 왕은 자애로운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반백이 되어가는 와중에서도 소년은 크게 자라지 않았다. 한 마리의 날렵한 맹수처럼 잘 빠진 몸은 무의식중에 잠재된 소년의 성향을 보이는 듯하다. 경계가 언제나 서 있는 몸상태. 소년은 자폐아의 모습은 조금이나마 회복했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과 같이 쾌활하게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왕은 늘 그것이 걱정이었다.
이제 자신의 수명도 길게 남지 않았다. 드루이드의 비술로 자신의 수명을 보았으나 남들보다 썩 긴 생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마저도 어쩌면 예상을 초과한 것이다. 마녀의 비약 덕이다.
"..."
왕은 말 없이 누운 소년에게 모포를 덮어주었다. 날카로운 반응이 있을 법 했으나 왕의 손길이 부모와 같았던 탓일까. 소년은 잠깐 떨더니 이내 깊게 잠들었다. 후손이 없는 자신의 유일한 후계다. 앞으로 남은 시간동안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낮에 완전히 내려앉은 의자를 보며 왕은 시름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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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큐브에 연재했었으나.. 귀찮아서 집어치우려고 생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