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에
“나 이사가”
진우는 고개를 돌려 아영을 바라보았다. 아침인데도 날은 너무 더웠다. 타는 듯한 태양보다는 숨을 막히게 하는 습기가 더 끔찍하다고 진우는 생각했다. 아영을 이렇게 더운데도 꼿꼿이 서 있었다. 시선은 골목 저편, 버스가 오는지 마는지 바라보는 자세로 아영은 그렇게 서 있었다. 그 옆얼굴에서 짜증이 느껴지는 것은 진우가 더위에 짜증났기 때문일까?
“뭐라고?”
“이사 간다고”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등굣길의 수마. 그리고 장마 직전의 더위가 진우를 몽롱하게 만들었다. 진우는 아영을 삐딱하게 올려다보는 자세 그대로 다시 질문했다.
“이사?”
“이사. 대구로”
“언제?”
“모레. 아, 버스 왔다”
진우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골목에서 파란색 15번 버스가 빠져나왔다. 타야 할 버스군. 안에 들어가면 좀 시원할까. 진우는 가까워지는 버스를 보며 잠깐 품었던 작은 희망을 구겨 데굴데굴 걷어찼다. 등교시간 버스가 으레 그러하듯 버스는 이미 만원이었다. 에어컨은 나오고 있겠지만 더운 것엔 변함이 없을게다. S여고에 가는 아이들, K남고에 가는 아이들. 버스는 두 가지 교복 무늬로 가득 메워진 과자상자 같았다. 아마 지독스레 답답한 과자상자일 테다. 아영을 따라 버스에 오르며 진우는 생각했다. 이사. 이사를 간다?
고3은 버스에서도 잘 수 있다. 자는 것과 조는 것은 다르다. 내릴 곳을 놓치는 아이들은 조는 아이들이다. 고3은 나약하지 않다. 서있든 앉아있든 기대있든 잘 수 있고, 정확한 시간에 깨어난다. 12년간의 체계적인 교육이 탄생시킨 아이들이다. 그런 과정을 착실하게 밟아온 진우는 그러나 자지 않았다. 고리에 손목을 걸치고는 진우는 아영을 생각했다. 신아영. 10월 9일생.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고 한달 쯤 뒤부터 쭉 우리 앞집에서 살아온 아이. 키는 162cm, 몸무게는 아마 51kg정도. 취미는 단 것 먹으면서 만화책 보기. 평소에는 조용하지만, 아니, 화났을 때도 조용하게 화내는 녀석. 하지만 단 것을 들고 가서 사과하면 쉽게 잊어주는 맘 좋은 녀석. 요즘 머리를 기르겠다고 학주와 싸운다는 S여고 8반. 공부는 나와 비슷하고. 그리고, 그리고. 19년, 아니 18년인가. 항상 아는 사이였기에 진우는 아영에 대한 것을 끝없이 떠올릴 수 있었다. 하긴 그건 마찬가지일 테다. 버스는 멈추고 출발하고, 다시 멈추고 출발했다. 타는 사람은 있지만 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에어컨 구명을 향해 몸을 비틀며 진우는 생각했다. 이사. 대구.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영은 농담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다. 특히 괜한 소리하는 성격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도 진우는 와 닿지가 않았다. 의미를 가지지 못한 채 그저 머릿속을 굴러다니는 단어들. 그리고 버스는 멈췄다. S여고 앞. 앞문으로 뒷문으로 여고생들이 우르르 내렸다. 아영도 내렸다. 삐ㅡ취익. 문이 닫히고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진우는 계속 생각했다.
“야, 오늘 시간표 뭐냐?”
“0교시 늦잠, 1교시 수면, 2교시 체육, 그리고 숙면, 잠자기, 점심시간인가? 그 다음엔 낮잠이고...”
“얼씨구, 2교시만 수업이냐?”
“그럴걸?”
모범적인 고3의 대화를 들으며 진우는 책상에 엎드렸다. 수능이 며칠 남았다고 저럴까? 자신도 비슷한 시간표를 계획 중이란 걸 무시하며 진우는 고개를 비틀어 교실 뒤쪽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아직 에어컨은 켜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우면 칭얼대는 나약한 어쩌고 하던 담임을 떠올렸다. 교무실에 상담한다고 가볼까. 거긴 에어컨 쌩쌩하던데. 아직 선생들 간식 남았을지도 모르고. 책상에 엎드린 채 진우는 잠들었다.
“김진우, 아침부터 퍼 자냐?”
진우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깨우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현수. 진우의 짝이다.
“이마에 도장 밖은 녀석이 할 말은 아니다?”
웃는 현수에게 한마디 팅겨주고는 진우는 기지개를 켰다. 시계를 보니 이미 0교시는 사라지고 없다. 시간은 정말 신비롭다. time is flying... 아니 time is warping 이려나? 왜 학교는 학생들을 일찍 나오라고 하는 걸까. 집에서 자나 학교서 자나. 어제가 내일 같은 고3의 일상이다. 시간표는 항상 자습이고 선생은 혼자 떠든다. 들어오는 선생들의 면면은 바뀌지만 아이들이 펴 놓은 책은 잘 바뀌지 않는다. 들어주고 싶어도 어차피 듣지도 못할 수업이다. 선생의 실력 어쩌고 문제가 아니라 이미 다 배운 내용, 듣다보면 깨어나는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학교는 학생을 만족시킬 수 없다. 하려면 선생 한명 당 5명 이하로 맞추던가. 그래서 진우는 딴생각을 했다. 아영. 이사. 항상 옆집에 살던 녀석이 이사를 간다니 딴 나라 이야기 같았다. 아쉬움, 혹은 후련함 같은 그런 감정도 없었다. 그냥 이상할 뿐이다. 하굣길에 물어보자 하굣길에. 그렇게 진우는 고민을 머리 한편으로 치워놓고 눈앞에 있는 수학 문제에 집중했다. 진우는 한 시간 동안 두문제를 풀었다.
“야, 체육 하러 나가자아”
“이 더위에?”
“냅둬 냅둬, 쟤 저러다 말겠지”
“야아아아, 나가자아. 15시간 자습하면 지겹지도 않냐?”
“에어컨 들고 가면 나간다!”
언제나 그렇듯 결말이 뻔히 보이는 싸움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엘리트 집단답게 논쟁의 승자는 언제나 목소리 큰사람. 그리고 대개 체육을 사랑하는 사람이 목소리가 큰 편이다. 진우는 미소 지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패스!”
“막아!”
“진우! 여기!”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열여섯 개의 발이 이리저리로 운동장을 복잡하게 움직였다. 오른쪽 끝을 따라 드리블링하던 진우는 자신을 막아서는 상대를 바라보며 멈춰 섰다. 두어 번의 드리블 후 진우는 상대를 살짝 밀고는 그대로 반대로 돌며 슛을 날렸다. 터닝에 이은 깔끔한 페이더웨이. 진우의 특기다. 손을 벗어난 공은 아이들의 머리위로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가로질렀다. 그리고,
-탱-
“야, 잡아!”
“아, 진짜 안 들어가네”
“야야, 김진우, 좀 넣어봐라”
진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3년 동안 농구만 해 온 아이들이니 서로 어느 정도 실력인지는 훤했다. 양편의 실력은 막상막하였고, 그 중 에이스에 꼽히는 진우가 오늘따라 제 역할을 못하면서 경기는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뭐야 김진우, 더위 먹었냐?”
“에효, 그러게 말이다. 한 개가 안 들어가네”
촤아아- 수돗가에서 진우는 그대로 머리를 박았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시간. 진우는 무언가 우습다고 생각했다. 자판기 앞에는 이미 장사진이다. 온몸을 찬물로 뒤집어썼는데도 진우는 더위를 느꼈다. 몸에서 김이 솟아오르는 것 같다. 내가 내 머리 위를 볼 수 있다면 아지랑이가 보일 텐데. 높은 습도와 높은 온도. 사우나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물이 땀으로 바뀌는 듯한 불쾌한 느낌. 비라도 내리지 않으려나. 태양은 뜨겁게 타올랐다.
붉은 태양이 산 너머로 고개를 떨구었어도 거리는 가로등 빛으로 여전히 붉었다. 능력껏 야자를 제껴도 아침에 나와서 저녁에 들어가는 것엔 변함이 없다. 진우는 두 대의 버스를 보내고 세 번째 버스에 올랐다. S여고와 마치는 시간이 미묘하게 다르기에 서로 정한 약속이다. 아니 약속이랄 것 까지는 없다.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그래서일까? 아영은 버스에 타지 않았다.
해가 지자 기다렸다는 듯 아스팔트는 하루 종일 품었던 열기를 사정없이 내뿜었다. 마치 다음 해가 뜨기 전까지 모두 뿜어내야 한다는 것처럼. 활짝 열어둔 창으로 바람이라도 좀 불어오면 좋으련만 느껴지는 것은 답답한 습기뿐이다. 진우는 결국 누워 자는 척 하기를 포기하고 머리맡에 둔 폰을 열었다. [오전] 3 : 16. 진우는 욕설을 뱉었다. 죽든 말든, 감기에 걸리든 말든 진우는 에어컨에 선풍기까지 켜 놓고 자고 싶었다. 불가능한 소망이다. 에어컨도 선풍기도 거실에 있고 부모님도 거실에서 주무신다. 방 밖으로 나갔다간 부모님이 깰 것이다. 진우의 부모님은 잠이 얕다. 진우는 침대위에 주저앉아 멍하니 창 밖을 응시했다. 한밤중이지만 가로등 빛은 여전히 밖을 밝히고 있었다. 아영. 이사. 모레. 아니 내일. 도착하고 나서도 버스를 한대 더 기다렸지만 아영은 내리지 않았다. 먼저 간 걸까, 아니면 훨씬 늦게 나온 걸까. 이사 간다는데 선물이라도 줘야하나. 생각만 해도 막막하다. 아영과 진우는 뭔가 어중간한 관계였다. 선물로 뭘 줄건 가. 진우는 얼마 전 아영이 데저트이글의 크롬도금 모형에 관심을 가지던 것을 떠올리고는 미소 지었다. 26만 3천원이던가? 하긴 뭐 설사 돈이 있다 치더라도 시간이 없다. 내일 모레 간다는데. 이사 간다고 영영 관계가 끊어지는 것도 아니다. 폰도 있고 인터넷도 있는 요즘 세상에 거리는 큰 장애가 아니다. 장애가 아닌가? 진우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을 무시하며 침대위에 누웠다. ‘눈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나니.’ 자야한다. 어서 자야한다. 아침에 다시 일어나야 하니까.
“왜 어제 안탔냐?”
“수행평가 때문에 야자 다 했어”
“하아?”
아영은 이상한 소리를 내는 진우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버스가 오는지 마는지 저 골목을 바라보았다. 어제 밤 너무 더워서 잠을 제대로 못잔 탓에 아영의 얼굴은 조금 부었다. 아영은 진우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기다렸니?”
“설마. 흐아아암. 더워서 못 잤더니 졸리다. 가냐?”
“응?”
“내일”
“응”
짤막짤막한 대화. 아영은 고집스레 진우를 돌아보지 않았다.
“갑작스러우니 실감이 안 난다야. 쩝. 선물 살 시간 정돈 줘야지”
아영은 돌아보려는 자신을 다시 한번 억누르고 말했다.
“됐어. 선물을 바랐으면 1년 전에 말했을 거야”
“킥. 하긴, 넌 그러고도 남겠다야”
언제나 그렇듯 버스에 오른 아영과 진우는 서로 말이 없었다. 아니,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략 중2가 되었을 무렵부터 그랬다. 두 사람 모두 남녀공학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이가 서먹서먹해 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 걸로 멀어지기엔 이미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그래도 두 사람 모두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어릴 때처럼 장난치거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니면 함께 웃거나 하지 않았다. 하긴 나이를 먹었으니 당연한걸까? 아영은 진우를 돌아보았다. 185cm의 늘씬한 키에 버스의 지지 봉을 잡고 약간 구부정하게 서 있는, 평상시엔 둔하기 그지없으며 이따금 멍청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지만 가끔씩 섬뜩할 만치 예리한 녀석. 항상 삐딱하게 비꼬는 말투가 특징이지만 그 속에 악의는 없고 알고 보면 순수하기 그지없는 애. 게임과 농구, 판타지에 적당히 빠져있으며 공부하는 양을 생각해보면 믿을 수 없을 만큼 괜찮은 성적을 가진 똑똑한 애. 요즘은 컴백한 서태지에 버닝 중. 좋아하는 음식도 싫어하는 음식도 특별히 없지만 매운 것은 잘 못 먹는 편.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영은 고개를 돌려 다시 차창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진우의 얼굴과 역시 무표정한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아영의 얼굴은 두개의 창이 엇갈리는 곳에 비치고 있었기에 어긋나 있었다. 아영은 물끄러미 자신의 어긋난 모습을 바라보았다.
“야, 어떻게 됐어?”
한 여아이가 아영의 어깨를 살짝 건들고는 책상에 걸터앉았다. 선화다. 학교 전체가 지인이라기엔 가까운 친구로 이루어진 남학생과 달리 여학생들은 끼리끼리 노는 편이다. 여러 가지 사소한 일들로 만들어진 이런 저런 그룹들. 그리고 그런 그룹들에 이리저리 중복되어 포함되어 있는 구성원들. 아영은 그런 그룹들이 적은 편에 속하는 아이였고 선화는 아영의 그런 그룹들에 대부분 속해있는 아이였다. 그러니까 여자아이들이 말하는 친구다.
“뭐가”
“에이, 모른척하기는 기집애. 어떻게 됐는데?”
“몰라”
아영은 책상위에 엎드렸다. 그런 아영을 보며 선화는 까탈스런 기집에 어쩌고 하며 피식 웃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아영은 엎드린 채 생각했다. 아영은 솔직했다. 자신도 정말 어떻게 된 건지 몰랐으니까.
아영은 교실을 바라보며 얼마 전 TV에서 본 어떤 CF를 떠올렸다. 깔끔한 여고생들이 깔끔 그 자체인 교정을 꺄르르 하며 걸어 올라가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남자아이들이 있을까? 여학교에서는 향기가 난다고 믿는 그런 아이들이 정말 있을까? 적어도 여자아이들 중에선 남자들은 모두 의리로 똘똘 뭉친 멋쟁이들이란 환상을 가진 사람은 없는데. 물론 여자아이들이 생활하는 곳이니 한없이 지저분하지는 않다. 청소도 하고 정리도 한다. 하지만 그건 정말 최소한의 깔끔함이다. 여자아이들은 필요한 것 이상을 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계산된, 똑똑한 게으름. 만약 환상에 빠진 남자아이가 지금 여기에 온다면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할걸? 몇몇 아이들은 체육복을 교복으로 갈아입고 있었고 선화는 돗자리를 개고 있었다. 돗자리. 정말, 선화다운 발상이고 여고생다운 발상이다. 어떻게 교실에 돗자리를 가져와서 누워 잘 생각을 했을까? 먼지하나 묻지 않은 교복-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가지런히 개어놨으니 당연히 깨끗한 교복-을 입고 교실을 빠져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아영은 피식 하고 웃었다.
“에? 우리 영이 무슨 생각 했기에 웃어?”
선화다. 자느라 부스스해진 머리도 깔끔하게 정리했다. 아영은 다시 미소 지었다.
“그냥. 이것저것”
“흐응? 어? 너 오늘도 야자 하니?”
“아아”
“웬일이래? 담임이랑 대판 싸워서 기어코 야자 뺀 기집애가?”
“글쎄다. 이제 백 몇 십일 남았는데 공부해야지”
“148일이셔. 흥, 잘하는 애가 꼭 저런대요. 나는 먼저 간다”
“그래”
아영은 교실을 나가는 선화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창 너머로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3명, 4명, 혹은 6명씩 조막조막 무리를 지은 아이들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가고 있었다. 오후 7시 반. 하늘에는 예쁘게 노을이 졌다. 이제 슬슬 장마가 오려는지 하늘 저편에서는 구름이 슬금슬금 떠와서 지는 태양을 가리려 하고 있었다. 붉은 태양은 검은 구름마저 붉게 태웠다.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물끄러미 창 밖을 보던 아영은 한숨을 내 쉬었다.
10시 30분. 11번 막차를 아영은 무표정하게 올랐다. 삑. 650원. 잔액 5950원. 감사합니다. 언제나와 같은 일상이다. 아영은 항상 그러하듯 몸을 돌려 앉을 자리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영은 깜짝 놀라 우뚝 멈춰 섰다. 바로 앞에서 진우가 아영을 보며 웃고 있었다. 아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우가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자 그제서야 아영은 버스 한편에 기대어 섰다. 놀란 가슴이 세차게 고동쳤다. 차창위로 진우의 비웃는 듯한 미소가 비치는 듯 했다. 아영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날따라 집까지 가는 버스가 정말 느렸다.
“무슨 일로 이렇게 집에 늦게 가?”
“어유. 그러게 말이야. 나도 오늘따라 수행평가를 야자 내내 했거든. 고3에게 그런 수행평가라니, 선생 웃기지?”
진우는 비웃는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아영은 쀼루퉁해졌다. 자신이 돌아보며 먼저 말하기를 싱글싱글 웃으며 기다리고 있을 진우가 눈에 선했다. 그래서 아영은 발 앞만 내려다보며 걸었다. 날씨는 여전히 더웠지만 그래도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드디어 장마가 오고 있는 걸까? 그러면 좀 덜 더울 텐데. 계속되는 침묵 속에서 결국 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일 간다고?”
“응”
“몇 시?”
“몰라. 일요일이니까 아침에 간댔어”
거리는 조용했다. 가게들은 대부분 불이 꺼졌고 이런 길엔 차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어른들은 술집이나 유흥가로 향했을 테고 애들은 집에 다 들어갔을 시간이다. 아영은 지금 이 시간이 고등학생의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토요일에도 이 시간 까지 야자 하는 것은 고3뿐이니, 고3의 시간이고 고3의 거리라고 생각했다. 붉은 가로등과 붉게 물든 가로수와 기묘한 그림자가 그려지는 골목길. 그곳을 걸어 아영과 진우는 집에 도착했다. 나란히 마주보는 주택. 대문은 둘 다 붉은 빛이었다. 그 중에서 조금 밝은 것이 아영의 집이고 조금 어두운 것이 진우 네의 대문이다.
“들어가라”
“응”
“에.... 내일 인사 지금 할게. 일요일에 일어나겠냐?”
“흥이다 야. 안 해도 되”
“그러냐?”
여전히 진우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가로등 때문일까? 아영은 그 미소가 왠지 평소와 다른 것 같았다. 아영은 진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 잘 자라”
“그래, 너도”
아영은 대문을 들어섰다. 끼이익 철컥. 아영은 대문에 기대서서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후 발자국 소리와 대문 여닫히는 소리, 그리고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영은 한숨을 쉬었다.
진우는 일어났다. 9시 20분. 도대체 잠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어제 저녁도 덥기는 마찬가지였고 선풍기는 거실에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거릴 낄 것 없이 들어오는 습기는 진우에게 상쾌한 아침이 아닌 짜증나는 아침을 선물하고 있었다. 진우는 비틀비틀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창 밖이 보일 리 없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도 안 보이는데. 하늘과 산과 건물 같은 것들. 그런 불명확한 형체들을 바라보며 진우는 창가에 벗어둔 안경을 썼다. 세상이 진우에게로 다가왔다.
아영은 계단참에 앉아서 짐을 거의 다 꾸려가는 이사차를 바라보았다. 작은 트럭뒤에 책상과 옷장과 상자 같은 것들이 실리고 있었다. 아영은 진우 네를 돌아보았다. 대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아영은 다시 발밑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선화. 죽었어.
진우는 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큰 차는 출발했는지 작은 용달차 하나가 잡다한 짐을 꾸리는 모양이었다. 그 옆에선 아영이네 부모님과 아영의 오빠가 진우의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다. 그러고 보니 왜 엄마가 나에게 아영이 이사 간다는 이야기 안했을까? 진우는 피식 웃었다. 쉬운 문제다. 요 한 달 동안 엄마 자는 모습 말고는 본 기억이 없는걸. 그 옆, 아영이네 계단참에 아영은 앉아서 짐을 꾸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진우는 아영을 응시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아영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비가 내릴 모양이다. 하늘은 검은 구름에 겹겹이 싸여 세상은 적당히 밝았다. 그래도 날씨는 여전히 더웠다. 아니 불쾌했다. 높은 습도 때문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아영은 답답했다. 삐이걱.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영은 일어서며 고개를 돌렸다.
진우는 아영을 바라보았다. 대문에-그늘에- 기대설까 했지만 세상은 모두 그늘이었다. 진우는 아영에게도 걸어갔다. 태양이 숨어있어도 더운 건 마찬가지 였다. 비라도 내리면 좀 시원해질까? 급히 씻고 채 다 닦아내지 못한 물기가 땀이 되어 흐르는 것 같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진우는 답답했다. 진우는 아영의 앞에 섰다.
“가냐?‘
“응? 아. 어. 응”
아영답지 않은 대답에 진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기, 어, 음. 가서도 연락은 해라. 바로 모르는 사람 되지 말고”
“핏. 알았어”
“응. 그리고, 에....”진우답지 않은 모습에 아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든 일단 하고나서 후회하는 애가 왜 저럴까? 아영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라면?
“저기, 음....”
진우는 입안이 말라왔다. 꽉 진 주먹에 땀이 챘다. 아영은 그냥 진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진우는 아영의 눈을 바라보았다. 검고 둥근, 쌍꺼풀이 없지만 예쁜 눈. 진우는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가거든 딴 남자애 만나지마.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응?”
“그러니까... 아니야. 그럼 잘 가라”
진우는 말을 급하게 끝맺고는 몸을 돌려 집으로 걸어갔다. 몇 발자국 안 되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진우는 뛰고 싶었다. 화끈해진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고 싶었다. 되지도 않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날씨는 짜증나게 더웠다.
“이사 안가”
진우는 우뚝 멈춰 섰다. 뭐라고?
“이사 안가. 내가 가는 거 아냐. 우리 오빠가 가는 거야. 대구로”
응? 뭐라고? 진우는 고개를 돌렸다. 방금 뭐라고?
“이사 안가”
아영은 약간 발개진 얼굴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진우의 눈동자가 조금씩 커졌다. 아영은 집 안으로 달음박질쳤다. 타닥타닥.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아영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당장 선화에게 전화해야지!
진우는 우두커니 서서 아영 네 대문을 바라보았다. 계속 커지던 눈동자가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진우는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진우네 부모님과 아영의 오빠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트럭 안에 실린 것은 책장과 옷장과 그리고 상자들. 진우의 눈에서 초점이 흐려졌다. 그리고 -두둑- 진우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또 -두둑- 진우는 땅을 바라보았다. 아스팔트 위로 검은 점들이 하나 둘 생기고 있었다. -두둑. 두둑. 쏴아아- 소나기? 장마?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욕설을 내뱉는 것이 빗소리에 섞여 진우의 귀에 들려왔다. -쏴아아- 시원한 빗줄기가 쏟아졌다. 아스팔트 위로 안개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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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만에 글이군요.
......제길 왜 설정은 웃겼는데 글은 안웃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