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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게시판

[상상연작] 그대에게 건배

2006.12.05 07:37

네모Dori 조회 수:1861




-자주 오시네요.

그저 그런 맞장구를 치면서 자리에 앉는다. 오늘은 운이 좋다. 제일 안 쪽 자리가 비어있다. 조명이 잘 닫지 않는 이곳은 어디에서도 잘 볼 수 없지만 어디든 잘 볼 수 있다. 딱 내 취향의 자리.

-오늘은 어떤 걸로? 역시나 블루마가리타?

블루마가리타를 마실까 했지만 그 말을 듣고 나니 생각이 바뀐다. 어린애 같지만, 뭐 그런거다. 글쎄요. 말 끝을 흐려본다. 뭐가 좋을까. 가미가제? 나쁘지는 않지만 가미가제보단 마가리타가 나아. 그럼 데낄라썬라이즈? 아냐. 그건 데낄라 맛이 너무 강해서 느끼해. 아니면 초심으로 돌아가서 도쿄아이스티?

-러스티네일이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싱글 싱글 웃으며 칵테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바라본다. 잔을 꺼내고 얼음을 넣고 위스키를 따른다. 그리고 드람뷔. 이까지 꿀 향기가 퍼지는 것 같다. 말도 안되는 환상인걸 아는데도. 지식이 꾸며낸 거짓을 밀어내며 눈 앞에 놓이는 잔을 바라본다. 꿀 향기가, 퍼진다.

-오늘은 특별하시네요. 무슨 일 있어요?

글쎄다. 무슨 일 있던가. 무슨 일은 무슨 일이지? 무미 건조한듯 느껴지는 일상도 잘 생각해보면 언제나 새로운 일 투성이다.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뭐, 뻔하지 않은가? 매일 둘이서 오다가 혼자서 오면?

-에이, 빨리 깨지는게 좋아요. 그래야 계속 새로운 사람 만나죠.

적당한 맞장구는 언제나 어렵지 않았는데. 가볍게 잔을 젓고 한모금 머금는다. 달콤한 향이 퍼지고 차가운 술이 목을 타 넘는다. 차가움이 식도를 내려가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되어 꽉 막힌 목을 뚫고 올라온다. 탁월한 선택이었어. 말이 좀 더 쉬워진다.

-저도 러스티네일을 참 좋아하는데 이게 잘 안나가요. 위스키 베이스라 그런지 잘 안찾으시더라군요.

모르지. 잘 찾는 레시피면 오히려 내가 외면했을지도. 확실히 위스키 베이스라 쉽게 넘어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만큼 쉽게 취기가 오르니 나쁠 것 없다. 그리고 진탕 퍼마시고 다 잊고 싶었다면 바에 왔을리는 없지. 근데 벌써 거의 다 비었다. 한모금? 두모금? 마지막 남은 잔은 비우기 아쉽다. 오늘은 더 마실 생각이 없으니 더욱 아쉽다. 생각보다 혼자 오니 심심하다. 술 마시기 시작하면 말하는 것조차 귀찮아져서 계속 조용해지니 침묵의 공간은 깊어만 간다. 일행이라도 있으면 바텐더도 날 다루기 좀 더 쉬울텐데. 내가 미안해지려 하는걸. 빨리 마시고 일어서려해도 너무 아쉽다. 마지막 한모금이.

손에 감기는 러스티네일은 차갑다. 입술에 닿는 러스티네일은 향긋하다. 입에 머금은 러스티네일은 달콤하다. 그리고 내 속에 담긴 러스티네일은 뜨겁다.

아. 몰랐는데 그 뜨거움 속에도 향이 있다. 머리가 편해지는 기분이 드는 이건, 허브인가? 몰랐는데.

-러스티네일은 괜찮으셨나요? 조심해서 가세요.

러스티네일의 뜻은 녹슨 못. 내 안의 녹슨 못이 뽑힌건지 더 깊게 박힌건지 잘 모르겠다. 알려면? 다시 한잔 더 해야 하려나. 그땐 다른 누군가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