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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게시판

어느 여름 밤

2004.12.17 03:09

네모Dori 조회 수:2020


째르르륵 짹짹. 날카로운 새의 노래에 귀를 막아버리고 싶다. 눈꺼풀을 찔러드는 햇살은 따갑기 그지없다.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바깥, 맑아오는 정신, 게다가 등은 점점 아파온다. 그래도 내가 침대 속에 누워 꼼짝하지 않는 것은 일어나는데 필요한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직 충족되지 않아서다.

-씨어! 햇님은 벌써 나들이를 시작했다구. 일어나 일어나, 이 잠꾸러기

그래그래, 오늘도 올 거라 생각하고 있었어. 어제 파림씨가 도시로 나가시는 걸 봤거든.
잠은 깨 있었지만 눈은 계속 감고 있었기 때문에 앞이 부옇다. 깜박깜박. 스르륵 시야가 맑아진다. 안경을 쓰는 게 이런 기분일까?

-아직 밥도 안 먹었지? 빨리 먹고 같이 놀러나가자. 응? 으응?

너야말로 머리나 좀 다듬지? 옷매무새도 그게 뭐냐? 세수는 했니? 에이, 뭘 그런 말에 삐지니. 들어와 들어와. 같이 먹자. 하핫, 진짜 삐졌나보네. 뭐 10초만 지나면 부엌으로 달려올 테지. 그러고 보니 아침이 쿠키던가? 야야, 문 부서져! 훗, 역시.



이거, 오늘 아무래도 불안하다. 저번 동굴 탐사 때 같은 복장이다. 게다가 저 배낭엔 뭐가 들어 있는 거야? 어딜 가길래 저렇게 준비가 철저해? 뭘 읽은 거지? 요 근래엔 독서가 뜸하던데. 기억이 나지 않으면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니겠어?

-응? 요즘은 별로, 아빠가 도시 갔다가 돌아오실 때 선물로 몇 권 사다주시기로 했어. 우히히. 그리, 네가 선물해준 그 책 정말 재미있었어

그렇겠지. 나도 그 책 고르느라 신경 좀 썼지. 꽃이야 길가에도 있으니 멀리 안가도 되고 말야. 어? 아, 아니. 아무 말 아냐. 하하.
그런데 진짜 신경 쓰이네. 초록색 바지라. 그렇게 치마를 좋아하는 애가 웬일이야? 히디안 숲에 갈 때도 치마입고 가더니 어째서 바지를? 게다가 지금은 여름인데. 그닥 다리를 못 봐서 아쉽다는 건 아니지만 말야. 음, 흐으음.






-랄랄라 랄랄라 랄라라랄라랄랄랄라- 씨어야, 날씨 정말 좋다 그지?

그래, 카스텔. 너는 좋겠지. 하지만 이 가방을 메고 있는 나도 좀 생각해 주겠어? 요 기집애 도대체 우리 집까지 이걸 어떻게 들고 왔대? 혹시 가방에 든 게 다 돌멩이 아냐?  분명히 이런 준비를 도와준 사람은 그 유모렷다! 으으음. 다음에 만나면 꼭 한마디 하겠어.



-어? 목적지? 음... 그냥 산에, 산책이야 우히히. 그냥 그냥. 에헤헤 가자가자

이거 갈수록 불안한데. 다른 때도 목적지를 말해주진 않았지만 이번엔 조금 뉘앙스가 다르다. 뭔가 숨기고 있는 느낌이랄까. 근데 이 방향은 분명 크티엔 화산... 허억! 동굴! 박쥐똥! 싫어!

-아니야 동굴은 안 간다고. 진짜라니까, 진짜야! 씨어! 내 말 못 믿어?

사실 그렇다네.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속았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쏟아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에휴.






-어쩌지?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아. 이힝

뭐라고? 길을 잃어버렸어? 헉!

-이이잉, 정말 어떻게 해? 날이 곧 저물... 지는 않겠지만 저물면 정말 큰일이야아, 어쩌지? 여기서 자는 수밖에 없는 거야? 훌쩍

…… 저런, 길을 잃어버리셨군요.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산을 타다 갑자기 만면에 득의만만한 미소를 띠더니 고개를 확 돌리고 울먹이기라. 믿음이 팍팍 가는데?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만 보면 된다. 바로 저 망할 만큼 무거운 가방 속! 뭐야 이거, 도시락, 물병, 과일, 모포에 배게... 얼씨구? 이건 카스텔이 잘 때 안고 자는 인형이잖아?
으으으으음!

-어? 아하하, 다, 다행이다. 혹시나 해서 이것저것 챙겼는데 헤헤. 무거웠어?



그 유모, 젊었을 때 어떻게 놀고 다닌 거야? 마을에 숨겨진 좋은 장소란 장소는 다 알고 있다. 나도 만만치 않게 돌아다니지만 이런 곳이 있다는 건 전혀 몰랐어.
조그마한 둥근 언덕인데 누군가가 돌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부드러운 잔디가 깔려있고 빙 둘러 낮은 나무가 자라있다. 그러면서도 마을을 내려다 보기엔 전혀 방해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명당. 하늘은 탁 트여있고, 전망 좋고, 산들바람 불어오고. 내가 왜 이런 곳을 몰랐지?

-저기 씨어야. 모닥불도 피우자. 별로 추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응?

모닥불? 캠프파이어? 하지만 도구가... 가방에 있겠지. 손도끼에 점화통에, 얼쑤, 친절하게 마른 장작도 있네? 이야, 참 철저한 준빕니다 그려? 진짜, 이러니 그렇게 무거웠지!






모포도 깔고 모닥불도 피웠지만 날씨가 춥지 않으니 이건 아름다운 분위기 조성을 위한 소품이랄까?
쉬이앙,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잔디에 드러누웠다. 등산하느라 쌓인 피로가 바람에 실려 날아간다.

-노을이다. 있잖아, 저번에 나한테 선물해 준 책 있잖아? 그거 읽고부터는 노을만 보면 세오가 떠올라

노을. 하늘에서 타는 불. 매일매일 본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내려다보는 노을은 느낌이 전혀 다르다. 태양은 바알같고 동그랗다.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슬픈 붉은 눈동자. 연오가 흘린 눈물이 르오느에 부서지며 하늘을 점차 붉게 만든다. 나도 감상적이 돼 가는군.
하늘의 불이 사그라질수록 모닥불은 바알같게 타올랐다.



도시락도 다 먹고, 과일도 깎아먹고, 체커게임도 하고.(체커판 까지 들어있다니, 유모 진짜 준비정신 탁월하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주위를 둘러보니 하늘은 이미 새카맣고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달은 아직 완전히 차지 않아 기우뚱한 것이 어색하다. 팽그르르 떨어질 것처럼 말야.

-보름날 왔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 아예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고백하는군? 후훗. 여름날 밤이지만 산 속이다 보니 조금씩 추워지는구나. 모닥불을 피우길 잘했어. 타닥타닥타닥. 부서지는 나무는 불티가 되어 하늘을 난다. 붉은 반딧불이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타닥타닥. 붉은 머리의 카스텔이 얼굴도 붉게 물든다. 타다닥.
별빛도 쏟아지다 멈추고 모닥불도 타오르다 굳었는데 불티만이 끊임없이 나르고 사라진다. 멈춰진 시간 속에 유일하게 움직이는 반딧불이. 이렇게 예뻤던가? 붉게 물든 카스텔의 눈에는 푸른 별이 가득하다. 밤에 취해서, 불빛에 취해서, 그 별빛을 향해 달처럼 속삭인다.

“좋아해, 카스텔”

푸른 달과 붉은 불. 타오르는 모닥불과 사그르는 불티. 그리고 분명히 느낄 수 있어. 빨개진 카스텔의 얼굴을.







산을 내려가는 카스텔에겐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역시나. 몇 번이나 답사한걸까. 그건 그렇고 다음엔 나도 유모를 찾아 가 봐야겠어. 항상 끌려 다닐 수 없으니까. 아, 마침 저기에...

-카스텔! 어젯밤에 어디에 있었니. 걱정했잖아
-아, 그게... 저... 어, 씨어랑... 같이...
-뭐! 씨어랑 둘이서 잤... 카스텔!

뭐라고 유모? 어? 잠깐, 얼굴을 왜 붉히는데? 어? 아니 유모, 그게 아니라, 야! 카스텔 말좀 해봐, 야,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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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혹시 '나들이'와 '한달에 한번씩 달님이 사라지는 이유' 읽으신 분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사라졌던 씨어&카스텔의 재림입니다. 아하하.

여담, 연애라곤 머리털 나고 한번도 없었던 누군가가 lovelove한 장면 묘사라는 극 전개에 좌절해서 2달간 공책에 묻혀있었다고 하더군요. 후후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커플들에게, 300만 솔로부대의 이름으로 저주를! 뺘샤!